인천 갈릴리교회 김명환 목사

우리말에 십리 땅속은 알아도,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의 변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하이예나’라고 부른다. 인간이 살면서 가장 알기 어렵고, 가장 답답해하는 것이 사람이다. 우리는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고, 도움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다.

누구나 처음 보는 사람이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에게 득이 되는 사람인지. 아니면해가 되는 사람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모두가 답답해한다. 서로를 이용하려고만 한다. 한마디로 인정이 메말라 버렸다. 너와 나를 주고받을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지 않았다. 인간 모두는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나 혼자 살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은 삭막하고, 차갑다.

모든 범죄와 인간 소외는 나 혼자 살려고 하는데서 발생한다. 모든 전쟁과 살상은 나를 중심해서 살려고 하는데서 일어난다. 또 이 세상은 너와 나만이 사는 곳이 아니다. 나와 너만 살려고 하는데서 제3자가 얼마나 희생되고, 소외되었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나와 너를 위해 ‘그’를 희생시키며 살고 있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사는 길은 나와 너와 그를 죽음으로 이끄는 길이다.

나만 살려고 나를 중심으로 살 때, 이 세상은 죽음이 지배하는 삭막한 세상이 된다. 나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두고, 나의 중심을 이웃과 나눌 때, 이 세상은 생명에의 길로 이끌리며, 생명이 지배하게 된다. 이 진리를 예수님은 삶으로써,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가르쳐 주었다. 그리스도는 남을 위한 존재가 됨으로써 친이 생명이 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삶을 열고, 가정을 개방해 상처받은 사람을 맞아야 한다.

이러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묵상하며, 종종 생각해 본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아니 사람들은 이웃을 얕게, 짧게 만나며, 그 사람을 정죄하고, 속단하며, 상처를 준다. 사람을 깊이 있게 오래 만나면서도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가 영원한 생명의 길에 이르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 27절과 28절에서 반복해 “이같이 행하라”고 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에 중점을 두지 않고, 행위에 더 중점을 두었다. 그렇다고 믿음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는 것이다. 죽어버린 믿음, 교리적으로 굳어버려 생명력을 상실한 믿음, 지식만의 믿음은 영원한 생명과 아무 관계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라고 하는 예수님의 답변은 유대교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교리주의자나 고지식한 교인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오늘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하나님나라를 말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책망으로 들린다. 분명한 것은 산 믿음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교육하고 있다. 그렇다 사랑을 행하면, 영원히 살 수 있다. 강도만난 이웃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은 조건 없는, 계산하지 않는 사랑의 행위이다.

조건을 붙인 사랑, 돌려받을 것을 계산한 사랑은 오염된 물이 질병과 죽음의 길로 이끌 듯이 인간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 무조건적인 사랑만이 인간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흐르며, 생명을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사마리아인의 행위는 보상을 염두하지 않은 행위이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 지식인에 있지도 않고, 단순한 믿음에 있지 않고, 사랑의 행위에 있다고 우리에게 교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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