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 합동해외총회 총회장 박요한 목사

<조선통치와 기독교>(1921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나타난 이토의 선교사들을 향한 발언은 3.1만세운동 직후, 악화된 국제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한 회유정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상 일체의 사건은 제가 담당하지만, 금후 조선에서 정신적 방면의 계몽과 교회에 관하여는 바라 건데 당신들이 담당해 주시오. 그리하여야만 조선의 인민을 유도하는 사업을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당시 일본 국내여론은 한국침략의 가장 큰 장애세력으로 선교사들이라는 단정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다. 일제는 선교사들을 이용하여 한국침략에 대한 국제적 비판여론을 무마하고, 한국인들의 민족의식과 저항의식을 저지시키려고 했다. 선교사들과의 접촉을 강화하여 외국선교사들과 협동하는 현명함도 보였다. 

이토는 일본 메소디트린교회의 건축을 위해 1만원을 내놓았고, 조선인 소속의 중앙기독교청년회 사업 유지를 위해서 매년 1만원을 지원했다. 이정도면, 일본이 한국의 해외선교사들을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선교사들을 수시로 초청하여 연회를 열었는가 하면, 일본인과 한국인관리들에게 선교사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공언했다. 이토는 황성기독교청년회관 개관식에도 참여했다. 

일본 국내여론은 반미감정이 높아지고 있었다. 선교사들에 대한 감정까지도 악화되어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을 선동, 일본에 반항하도록 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이토는 “선교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두둔했다. 이것은 이토가 선교사들과 미국에 대하여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친일파 송병준은 일본에서 “현재 가장 우려해야 할 것은 그 본질이 애매한 기독교도 약 35만명의 일당이다. …(중략)…그들의 배후에는 미국 선교사 일당이 있다. 기독교도 문제는 필경 장래 한국문제 가운데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고 ‘한국선교사와 기독교’를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이에 이토는 송병준을 대무대신에서 사임하게 했다. 한마디로 이토는 자신의 심복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선교사들로부터 환심을 사려고 했던 것이다. 대신 한국인들의 ‘민족의식’ 단속을 부탁했다. 

이에 마펫을 비롯한 게일, 헤리슨, 휘트모어, 하운셀 등은 “교회는 정치적 단체는 아니지만 법률을 준수하고 정부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도록 교훈하고 있다. 종교교육의 자유를 이용하여 관립학교와의 차별을 없애준다면, 그들의 교육정책을 충실히 따르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일제는 종교교육의 자유를 보장했다. 성경교과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졸업생들도 관립학교와 동등한 자격을 인정했다. 

일제는 이러한 유화정책으로 선교사들을 회유 이용하면서도, 선교사들을 믿지 않았다. 헌병과 경찰을 붙여 선교사들을 감시했다. 조금이라도 배임적인 태도가 보이면, 트집을 잡고 압력을 가하였다. 이들의 감시기록은 오늘날까지 국사편찬위원회가 영인한 <주한일본공사관기록> 28권에 수록되었다. 당시 영국은 일본에 대해 가장 큰 우호국이었으며, 미국은 일제와 태평양을 둘러싸고 견제적인 관계였다. 

1910년도 이 기록은 선교사들에 대한 의견서, 한국기독교의 교세와 선교사들의 영향력, 선교사 개개인의 태도, 기독교의 활동을 논하고, “기독교의 전파는 점점 민심의 불온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나아가 장래의 시정상 일종의 ‘병의 근원’을 낳기에 이를 것이다”고 적고 있다. 결과적으로 일제는 선교사들의 세력과 영향력을 축소, 일본종교가의 한국기독교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제 말 한국기독교가 일본기독교에 편입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영미의 교파주의가 뿌린 내린 한국교회가 하나된 것은 일제에 의해 이 때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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