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 호헌 증경총회장 김바울 목사

부활의 아침, 한국교회는 죽임 당한자의 ‘한의 소리’를 듣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죽임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며, 죽임당한자의 ‘한의 소리’를 듣고 행동해야 할 교회는, 힘의 의한 평화(팍스)를 말하기에 바쁘다. 남북한 적대적인 발언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한번에 100만명이 죽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을 잃어버린 오늘 보수적인 한국교회 교인들의 모습이다.

일부 목사들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향해 “돈 벌려고 위안부에 지원했다”고 아무렇지 않게 기도회의 장소에서 말한다. 이명박 전대통령과 주변 인물들의 검찰 소환과 구속을 보면서, 잠만 자고 일어나면 시정당국에 끌려간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교회가 태아도 생명이라며, 헌재의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판결에 대해 한목소리로 비난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영미의 근본주의 신학, 정통주의 신학, 제국주의 신학, 성장주의에 매몰된 한국교회의 이 같은 모습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영미의 교파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교회의 분열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그것은 남북한의 분단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주의가 성직자들의 사고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교회는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서 이탈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무식하고, 떠돌이, 과부, 창녀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계셨다. 이곳은 예수님의 삶의 현장이다. 이 곳에서 이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또 평화(샬롬)운동을 벌이셨다. 부활의 아침,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임당한 자의 ‘한의 소리’, ‘피의 절규’를 듣고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세계 여러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평화운동은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최소한 몸부림이다. 오늘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내가 이기고, 네가 지는 것’이 아니다. 모두 함께 죽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남북한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고 외친다. 그런데 세계 곳곳에서 ‘평화’라는 이름으로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잇다. 이러한 역사의 추세를 누가 막고 나설 것인가. 그것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며, 세계 교회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평화를 노래해야 할 교회가 전쟁과 민족 갈등을 부추기며, 평화를 파괴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전쟁과 약탈의 신으로 만든 것이 서구 기독교의 왜곡이다. 8세기 테롤 대제의 선교전쟁, 이슬람 무역상들과 베니스 상인들의 갈등을 등에 업고 일어난 11세기의 십자군전쟁,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와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양대 대전 등 대부분의 전쟁은 기독교 국가들에 의해서 자행되었다.

지금도 기독교 국가에 의해서 세계 곳곳서 전쟁이 멈추지 않고 있다. 예수님의 평화(샬롬)를 말해야 할 한국교회는, 힘에 의한 평화(팍스)를 말하고 있지 않은가. 부활의 아침, 한국교회는 세계의 흐름을 직시하고, 반전, 반핵운동의 중심으로 들어가 한반도의 평화를 넘어 세계민족의 평화를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죽임당한자의 ‘한의 소리’와 ‘피의 절규’를 듣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특히 한국교회는 알아야 한다. 동독과 서독이 하나 되는데 그 중심에 독일교회가 있었다는 사실.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교회만큼은 하나였다. 서독교회는 동독의 정치범과 양심수를 돕는데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을 찾는 고난 받는 민족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오늘 영미의 근본주의적 제국주의 신학과 선교정책을 그대로 물려받은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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