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왕중앙교회 담임 황인찬 목사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가장 중요한 원리중의 하나가 은사를 따라 섬기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내 은사에 맞는 사역이다.

두 가지가 다 충족되어야 한다. 내가 어떤 일을 좋아하지만 잘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은사에 맞는 일이 아니다. 이것을 사회는 전문성이라고 한다. 한 공동체가 잘 되려면 전문성이 존중되고, 잘하는 사람을 발굴하여 그에게 적합한 일이 맡겨져야 한다.

심리학자 아브라함 마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의 가장 고도의 욕구를 자아실현의 욕구로 보았다. 누구나 은사에 맞는 일을 찾아 하면 인생의 보람을 느낀다. 은사의 헬라어 카리스마는 기쁨이라는 카라라에서 유래했다. 은사에 맞는 일을 하면 기쁘고, 즐겁고, 좋다.

느헤미야는 이런 은사의 원리대로 지도자들이 적재적소에서 일하게 함으로 단시일에 예루살렘성의 중건이라는 대업을 실현했다.

그리고 격려의 원리가 있다.

느헤미야 3장에 느헤미야가 세심하도록 여러 지도자들의 이름과 사역의 내용을 상술하는 이유는 격려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격려 받지 못하면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헌신하기가 쉽지 않다. 격려(encouragement)의 반대는 낙심이다. 격려 받으면 용기가 생기나 낙심(discouragement)하면 용기를 잃고, 의욕이 없어진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히10:24)고 한다.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는 유교문화 전통이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 유교문화를 성경적으로 보면 율법주의적 경향이 짖다. 따라서 우리들은 보편적으로 책망과 정죄는 빠르지만 격려가 결여되어 있다. 우리는 좀 더 서로를 격려할 필요가 있다.

칭찬을 모르는 가정이나 부부를 들여다보면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하다. 칭찬을 모르는 교회도 다를 것이 없다.

느헤미야는 느헤미야 3:20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은 특별한 수식어로 바룩을 격려한다. "그 다음은 사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였고…" 그의 특별한 '힘써' 노력한 헌신을 격려하고 있다.
느헤미야의 격려가 사역의 효율성을 증대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격려가 분위기 띄우기 정도의 수준이 아닌 진지한 격려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격려가 사실에 입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시적 효과 일 수밖에 낼 수가 없다.

느헤미야 3장에는 사역을 소홀히 한 사람에 대한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평가도 동시에 있다. 드고아의 귀족들에 대하여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느 3:5)라고 지적한다. 아마도 이들은 자신들의 귀족신분을 의식한 나머지 주의 일에 팔을 걷어 부치고, 적극적으로 헌신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필요이상의 비판을 조심하고 있는 느헤미야를 주목할 일이다. 그리고 이런 예외적인 사람들의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 3장 전체의 톤은 지극히 긍정적이다. 느헤미야는 유명 무명의 모든 공동체 사람들의 헌신으로 이 위대한 역사가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을 담담하게 기술하며 일일이 그들을 격려함에 인색하지 않다.

느헤미야 3장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은 느헤미야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태도야 말로 진정한 격려자의 모습이다.

초대교회에 이름조차도 '격려 자' 바나바가 있다. 그는 안디옥교회의 책임 있는 지도자로 예로살렘공의회로부터 파송 받은 리더다. 그런 바나바가 바울을 청빙하고, 격려하여 안디옥교회 지도자로 세우고, 세계선교에 나설 때 그 바울과 동반한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이 두 사람의 관계를 기술하며 "바나바와 사울이…"하다가 나중에는 "사울과 바나바가…"로 바뀐다. 리더십이 이양된 것을 말해준다.

바울이 된 사울이 세상을 바꾸는 놀라운 지도자가 되어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역의 무대 저편으로 조용히 퇴장한 지도자가 바로 바나바다.

이런 바나바가, 이런 느헤미야가 우리 시대에, 우리교회를 살릴 것이다. 작금의 한국교회에 이런 격려 자, 이런 리더들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기독교라인(대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