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중앙교회 김승자 목사

사람은 누구나 죽임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태어나고, 한번 죽는다. 그런데 한번 죽는 그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믿고 사는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비록 육은 죽으나, 영은 하늘나라에 임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죽음을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의 타락은 영생의 삶에서, 죽는 삶의 결과를 가져 왔다. 사람을 욕심대로 살게 했다. 마태복음 27장1- 10절에서 유대인의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 세겔에 팔아먹고. 두려움과 후회 속에서 나무에 줄을 달아 자살을 한다. 가룟 유다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죄한데 자신이 잘못 알고 팔아 넘겼기에 무효를 주장하러 갔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과는 상관없고 그 잘못은 네가 당하라‘면서, 거절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당시 성경적 문화에서 ‘은’ 삼십세겔은, 성인 남자 노예 값으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노예로 판 것이다. 이는 율법의 적용은 되지 않아 물릴 수가 없게 되었고, 노예의 개념이 되어 소유주가 바뀐 것이다. 유다는 이 사실을 알고 절망 했다. 일본은 사무라이가 주인을 향해 혁명을 일으키고, 성공을 하여도 선봉에 선 대장은 할복을 한다. 

이것은 일본 그들의 문화이다. 성경 속의 문화도 제자가 스승을 팔아 배반한 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방법인 자살을 선택했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만 능동적으로 표현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 죽음을 향해 택하시고 자신을 내 준 것이란 말이다. 생명의 주인이 사람들에 의해 죽은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그리스도가 스스로 인생들을 생각하사 택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자살이지만 수동적이었다. 예수그리스도 죽음 이외 사람들의 죽음은 모두 수동적이다.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나 행동인데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함부로 하는 행위인 자살에 대해 죄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생명의 주관자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으며, 자살 할 권리가 없다. 

마태복음 26장69-75절에 베드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배반했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치유 받기 전까지는 마음속에 가룟 유다와 같은 두려움, 죄책감 등으로 갈등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기에 자살을 하지 않았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지를 않아 세상적인 방법으로 명예로운 자살을 선택했다.

그 결과의 차이는, 베드로는 사도로 생애의 마지막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많은 신앙인들에게 존경 받았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영원한 배신자로 낙인 되어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이름은 오명이 되었다. 살아있어 예수님을 주라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고 말씀대로 살아온 사람은 많은 것에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음으로 영생을 얻는다. 쉽지 않는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가 많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지금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으로 삶을 선택한다. 사는 것이 축복이며, 인생의 성공이다. 그래서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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