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봉인장로선교사업회’는 양화진 역사 바로 세우기 공청회를 열고, 최봉인 장로의 역사를 바로 잡아달라고 촉구했다. 사진은 최봉인 장로의 손자며느리 최지연 사모.

‘최봉인장로선교사업회’는 양화진 역사 바로 세우기 공청회를 지난 12일 오전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에서 갖고, 양화진 선교관의 땅이 묘지 감검관 최봉인 장로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서교동교회 창립교인이자 초대 장로인 고 최봉인 장로가 현재 양화진 선교기념관의 소유주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국가 외교 문서인 궁내부 래안 외아문 일기가 결정적 증거다.

이는 1896년 10월 31일 독립신문에 ‘양화진을 개인소유가 아닌 외국인 묘지로 내어준다’는 기사를 보고 최봉인 장로가 당시 5개국 공사 대표인 러시아 공사 위베르를 통해 국가로부터 자신이 산 집과 땅이 국유지가 아닌 개인이 산 땅임을 승인하고 후일을 위해 문서를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면서 시작됐다.

결국 이 문서는 위베르가 외부대신 이완용에게, 이완용이 내무대신 이재순에게, 이재순이 관할청 홍현택에게, 홍현택이 이재순, 이재순이 이완용, 이완용이 위베르에게 전달한 문서와 답장 등이다. 말 그대로 최봉인 장로의 소유지임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인 셈이다.

이에 최봉인 장로의 손자며느리인 최지연 사모(샛별한국문화원 원장)는 “지난 2012년에 국가와 외교문서들을 통해 선교관이 할아버지 땅이라는 증거를 찾아냈다”면서, “지난 7년간 의견을 조율하는 긴 과정에서 당장이라도 소송을 걸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세상법보다 하나님의 사랑의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며 오늘에 이르는 과정과 더불어 공청회를 열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공청회가 끝난 뒤 기념사진.

이날 공청회에서는 자료를 통해 ‘최봉인장로선교사업회’의 주장에 대한 백주년기념사업회의 반박공문 내용과 함께 ‘최봉인장로선교사업회’의 답변도 담았다.

이들은 백주년측에서 주장하는 최봉인 장로가 감검관이 아닌 묘지기라는 주장에 대해 “최봉인 장로가 동네에서 제일 크고 멋진 집을 지어 죽을 때까지 살았고, 결혼 전에 땅과 집을 샀다”고 반박했다.

또 감검관이 최봉인 장로라는 이름이 없다는 것과 관련해선 “문서에는 감검관이 최봉인 장로라는 이름이 없지만, 다른 곳에 있다. 양화진 묘지 관리는 최봉인 장로가 죽던 1950년 6월 24일까지 다른 사람이 없었다. 60년 동안 하인, 소작인들과 관리했고, 일제하 선교사들이 쫒교 간 이후에도 오랜 세월 500개가 넘는 묘를 관리했다”고 밝혔다.

그 보충 자료로 선교사들의 일기에 최봉인이라는 이름이 여러 곳에 등장하는 것과, 결정적으로 1927년 5월 20일자 ‘매일신보’에 ‘양화진 묘지는 옛날 이태왕 전하로부터 외국인들에게 지로 사용하라고 하사하신 것이니 그 모는 보성전학교 교수 최등만씨의 부친 최봉인씨가 약 삼십년 전부터 맡아서 간호하여 내려오는 중’이라는 기사 내용을 증거로 들었다.

이들은 그러면서 최봉인 장로에 대한 역사를 바로 써 달라고 촉구하고, 선교관 2층 예배당의 경우도 명칭을 ‘최봉인 장로 기념 예배당’으로 바꿔줄 것을 요청했다. 덧붙여 최봉인 장로 후손들이 선교를 위한 모든 행사에 선교관을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는 것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와 더불어 이들은 법정 다툼도 염두해 두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기독교화해중제원 등을 통해 대화와 타협을 먼저 모색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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