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 개혁선교 부총회장 강동규 목사

"오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은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유관순 열사의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나라사랑 기도문이다. 유 열사는 손정도 목사가 담임하던 정동교회를 출석하면서,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사랑과 나라사랑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품었다. 유관순 열사가 외쳤던 "대한독립 만세"는 손정도 목사가 뿌린 말씀의 씨앗이 자란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손 목사의 나라를 사랑하는 설교는 이렇게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손 목사는 또한 청년 김일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다. 김일성이 청년시절 중국 길림에서 만주군벌에 잡혀 감옥에 있을 때, 손 목사와 그의 가족들은 김일성의 옥바라지를 해주었다. 손 목사의 노력으로 김일성은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은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 목사를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일성은 1931년 중국 길림에서 49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신 손정도 목사를 이렇게 회상한다.

"생전에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 속에 에워싸여 애국의 혼으로 그들을 열심히 교화시키던 목사일진대 고인과의 작별은 너무나도 조용하고 쓸쓸한 것이었다. 국부가 죽어도 마음대로 울지 못하는 세상이었으니"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손목사의 죽음을 일본 제국주의의 모살로 여겼다. 김일성이 '국부', '생명의 은인', '친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불렀던 손정도 목사는 1919년 이후 감리교에서 중국 및 러시아 지역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국회의장)을 지내던 인물이다. 그는 대한적십자와 대한교육회를 창설하기도 했다. 손목사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정부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손정도 목사는 최근까지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김일성은 자신이 죽던 1994년 '손정도 목사의 기념사업을 추진하라'는 유훈을 남겼고, 현재까지 그 관심이 지속되고 있다. 2001년 서영훈 전국무총리는 손정도 목사 후손들의 요청으로 '손정도 목사 기념사업회'를 발족하였다.

그리고 2003년 10월 평양에서는 손정도 목사 기념사업회, 감리교신학대학과 독립기념관 학자 등 남측 학자들과 북한 학자들이 함께 참여한 손정도 목사의 독립운동과 사상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2007년 4월 한국 국가보훈처는 손정도 목사를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했으며, 국회는 그에 대한 기념전시회를 개최하였다. 남과 북에서 목사로서 독립운동가로서 동시에 존경받고 있는 사람이 바로 손정도 목사이다.

손정도 목사는 2남 1녀를 두었다. 큰아들이 국방부장관을 지낸 원일이고, 둘째 아들이 방북하여 김일성을 60년만에 만난 원태이다. 김일성이 1991년 손원태 박사를 초청했고, 김정일은 1994년 8월, 김일성의 조문 기간에 방북한 손원태 박사의 생일잔치를 평양에서 마련해주었다. 그 인연으로 손원일의 아들 손명원 쌍용회사 사장단은 1994년 12월 방북하기도 했다. 그 방북은 얼어붙어 있던 남과 북을 녹이는 봄의 시작을 알리는 발걸음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마리아 땅이 되어버린 북한에 다시 소망을 품게 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손정도 목사는 우리에게 남과 북의 분단과 갈등을 풀어 가는 '사랑의 치유자'로 다시 자리매김 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나라사랑과 하나님사랑은 둘로 갈라진 남과 북을 하나로 되게 하는 씨앗이 된 것이다. 손정도 목사가 보여준 사랑은 큰아들 손원일이 묻힌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와 2004년에 사망한 작은아들 손원태 박사가 묻힌 평양 애국열사릉(국립묘지)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뛰어 넘어 여전히 빛나고 있다. (탈북자 김주원의 <북한의 종교-김일성과 손정도 목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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