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증경감독 임용화 목사

분열의 한복판에 있는 한국교회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선교의 경쟁력을 회복할 수 없다. 한국교회의 선교와 전도전략은, 우리의 선교현장이 변한 만큼, 바꿔져야 한다. 한국 초대교회의 선교 열정은 오늘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 만큼 한국교회도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자리를 돈으로 대치시켰다. 십자가 탑을 높이는데만 경쟁을 벌여 왔고, 벌이고 있다.

한국교회의 선교와 전도전략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꿔져야 한다.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은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는 한민족에게 희망의 복음이어야 한다. 문제는 희망을 잃어버린 눌린 자, 비정규직 노동자와 농민, 빈민, 떠돌이들이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선교정책과 전도전략이 이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가 가진 것을 가지고 나와, 생활에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생활공동체였다. 여기에 기독교의 가치가 있다. 한국교회도 초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선교정책을 펼쳐, 기독교가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라는 것을 입증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 역시 일용할 양식을 문제로 삼고 있다. 분명 주기도문은 부자들의 기도문이 아니다.

한마디로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은 가난한 사람, 고난당하는 민족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부자가 된 나머지 예수님의 시간과 공간에서 이탈해, 하나님의 자리를 맘몬으로 대치시켰다. 복음의 본질도 왜곡시켰다.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떠돌이, 노동자, 농민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눈물을 외면하고,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복을 빌어주기에 바쁘다.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 나가는 것보다도 어렵다고 했다. 강남의 일부 부자교회는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 줄줄은 알아도, 가난한 자들의 눈물은 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주자들이 드린 헌금에 복을 빌어준다.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는 외면한다.

성장이 멈춘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상황에 따른 선교정책을 세워 실행에 옮겼어야 했다.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교회는 소망이 없다. 미래가 없다. 이제 한국교회는 한국적 상황에 맞는 선교정책과 전도전략을 세워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는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예수님의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은 분단의 현장이며,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산업현장, 빈민촌, 외국인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대한민국의 하나님인 동시에 북한동포의 하나님이다. 또한 세계민족의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구원의 대상, 전도의 대상 역시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북한동포, 세계민족이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와 북한선교에 공을 드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한반도의 평화가 세계평화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남한민족을 위한 복음이고, 북한민족을 위한 복음이며, 세계민족을 위한 복음이다. 하나님나라는 혼자 갈 수 없다. 너와 나, 그리고 그가 함께 가야 한다. 남북한 민족 아니, 세계민족이 함께 가야 하는 곳이다. 이럼에도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에 혼자 가겠다고 아우성친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북한동포를 비롯한 세계민족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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