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김재성 교수

에라스무스와 루터 등 인문주의 학자들과 초기 종교개혁자들에게 영향을 준 많은 신학자는 로마 가톨릭 신부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6-1457)였다. 루터가 최초로 독일어 성경번역을 시도한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결국 그가 신구약 완역본을 출간해냈다. 그보다 한 세기 앞서서 살았던 로렌조 발라는 정확한 성경본문 이해를 촉구하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비판하여 (살후 2:8) 루터에게 확신을 주었으나, 그의 공헌은 충분하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츠빙글리가 선도적으로 앞서 전개한 성경중심의 교회 개혁은 그가 서거한 1531년 이후로 스위스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어졌다. 우리는 츠빙글리와 그의 성경적 개혁사상의 확고한 정립이 이뤄지기까지, 엄청난 격동과 갈등의 시대를 통과했음에도 주목해야만 한다. 결코 쉽지 않았다. 츠빙글리를 비롯하여 외콜람파디우스, 불링거, 칼빈 등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격동기에 최전선에 나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교회와 국가를 개혁하는 영향을 남겼다.

인간 사회의 역사와 그 가운데 흐르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유지되고 움직인다. 때로는 기독교 교회나 신학자들도 혼란에 빠져서 갈등과 대립에서 단 한 치의 개선을 이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한 사람의 지혜나 지식으로 모든 것을 다 성취하거나 파악하지 못했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을 주셔서 오묘한 뜻을 간직하고 펼치도록 하셨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곁에 계시며 힘을 주셨고, 사자들의 입에서 구해 내셨다고 회고하였는데 (딤후 4:17), 츠빙글리의 경우에도 그와 같은 생애의 업적과 시련을 동시에 맛보았다.

2. 츠빙글리의 성경의 적용과 성취들

우리는 츠빙글리가 교회의 전통보다는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확고한 판단을 갖고서 철저하게 노력했음을 한 번 더 확인하고자 한다. 그가 성경적 확신을 가지고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에 얼마나 큰 공헌을 하였는가를 살펴보자.

성경을 최종 권위로 인정했다는 것은 단순히 참된 지식의 근거만을 발견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성경은 지혜의 보고라거나, 구원의 복음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츠빙글리와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사회의 건설과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일에서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츠빙글리의 성경적 확신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그 적용을 위해서 교회가 시정부당국과 일반 정치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간여했다는 점이다. 츠빙글리의 선도적인 역할로 인해서 스위스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 진영에 가담한 목회자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비판하고, 시대적 변화를 깨닫게 되었다. 스위스 지방의 정치적인 문제는 곧바로 교회의 독립권과 자치권을 확립하는데 깊이 연계되어져 있었다. 세속 정부와 교회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균형을 잃어버린 상태로 유지되어 왔었다. 로마 가톨릭 교황청의 위상에 따라서 세속 통치자들의 맞대응이 혼란을 가져왔었다.

성경의 권위를 가장 신뢰하였다 하더라도, 많은 구절들에 대한 정확한 의미파악과 해석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츠빙글리의 성경해석과 개혁적인 신학사상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무엇보다도 16세기 신학의 핵심쟁점이었던 성만찬 해석에서 츠빙글리의 상징설은 가장 두드러진 가르침으로 남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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