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 보수 총무 김고현 목사

어느 아가씨가 공원을 산책하다 한 노신사가 앉아 있는 벤치 옆 자리에 앉았다. 조금 남아 있는 책을 마저 읽고 갈 참이었다. 벤치에 앉은 그 아가씨는 조금 전에 사온 크레커를 꺼내 하나씩 집어 먹으며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다. 그 아가씨는 문득 크레커가 줄어가는 속도가 왠지 빠르다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살펴보니 곁에 앉은 그 노신사가 슬며시 자기 크레커를 슬쩍슬쩍 빼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 아가씨는 “아니 이 노인네가” 하며 속으로 은근히 화가 조금 났지만, 그냥 모른체하며 두었다. 그러나 그 노신사의 손은 멈추지 않고 계속 크레커를 빼갔다. 아가씨의 눈은 책을 들여다가 보고 있었지만, 점점 온 신경이 크레커와 밉살스러운 그 노신사에게 쏠렸다. 크레커가 든 케이스는 점점 비워져 갔고 결국 마지막 한 개만이 남게 되었다.

노인의 뻔뻔스러움에 참지 못한 그녀는 드디어 “뭐 이런 웃기는 노인이 다 있어?” 하고 그 노신사를 향해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소리쳤다. 그러자 그 노인은 그런 그녀를 보고도 부드럽게 씨익 웃었다. 아무 소리 없이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별꼴을 다 보겠다며 투덜거리며 자리를 일어나던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사가지고 온 크레커는 봉지도 뜯지 않은 채로 그녀의 무릎 위에 고스란히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노신사가 자신의 크레카를 빼 먹은 것이 아니라 아가씨가 그 노신사의 크레거를 빼 먹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오히려 노신사는 자기 것을 빼앗기고도 부드럽게 웃던 노신사였고, 아가씨는 자기의 것을 빼앗기지도 않았으면서도 화를 내고 말았던 아가씨였다.

하지만 그 노신사는 그 것을 몰랐던 그 아가씨에게 크레커를 빼앗긴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나누어 주는 <나눔>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 빼앗기는 것과 나누는 것, 우리는 빼앗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아니면 나누어 주는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욕심이 가득한 인간의 마음이 어디 그런가. 성서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나눔과 섬김을 통한 사랑을 교육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이웃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대한민국은 ‘코로나19’바이러스로 인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다. 국민들은 가진 것의 일부를 내놓아 ‘코로라19’바이러스로 고통당하는 대구•경북의 국민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다. 교회들도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세계 여러나라의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참 이상한 나라”라고 말한다. 대한민국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어려움에 닥친 이웃과 함께하며, 어려움을 헤쳐 왔다. 자기 것을 내놓아 이웃과 함께하는 이웃이 있어 대한민국의 국민은 위대하다. 이상한 나라의 국민이다.

타무드에는 “다른 사람에게 향수를 뿌리면 자기에게도 몇 방울 정도 묻듯이 다른 사람에게 나눔을 전하면 자신에게도 분명히 그 나눔의 가치가 돌아온다”고 했다. 그 만큼 나눔은 매우 중요하며, 사람이 살아가는데 아름다운 생활공동체를 만들어 준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기독교라인(대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