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김재성 조직신학교수

1544년에 이르게 되면서 성만찬 신학의 정립을 놓고서 루터파와 츠빙글리파 사이에 새로운 논쟁이 격화되었다. 이 해에 루터는 “성만찬에 대한 간단한 고백서”를 출간했는데, 취리히 교회의 신학을 거의 이단적이라고 거칠게 비판하였다. 루터의 글이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면, 취리히와 제네바로부터 나온 성만찬 해석은 크게 위축되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이 위축되어지는 결과가 나오게 되어져 있었다. 독일어 사용권 지역에서 루터파의 신앙고백을 따르지 않는 개혁교회들은, 예를 들면 하이델베르크 지방과 같이, 합법적인 교회의 지위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루터의 권위와 영향력으로 인해서, 적어도 독일 지방이나 그 주변의 지역에서는 루터파 교회들과 개혁교회 진영사이에 내적인 교류가 단절될 형편이었다.

불링거는 1545년에 주변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루터가 이단적이라고 비난하였으나, 자신들의 신학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적극 옹호하고 홍보하였다. 칼빈도 역시 양 진영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불링거와 칼빈은 개혁교회의 지위가 위태롭다는 것을 거듭 인식하면서, 취리히와 칼빈의 제네바가 공동체로 단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츠빙글리의 후계자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불링거와 제네바의 칼빈은 수십 년간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불링거와 칼빈은 1536년 2월 처음으로 바젤에서 만났다. 1537년부터 1564년 칼빈이 사망할 때까지 불링거에게 직접 친필로 작성해서 보낸 편지가 무려 168통에 이른다. 그 내용들에는 개인적인 것들도 있고, 신학적인 것들, 정치적인 것들, 교회에 관련된 주제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두 사람은 스위스 내부적인 것들만 상의한 것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움직임과 사건들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했다. 불링거는 목회경험과 현실문제에 대응하는 전략이 탁월했고, 칼빈은 영특하고 예리한 신학지식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1540년대 후반에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개혁교회 진영이 전체적으로 존립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1549년 5월 칼빈과 파렐은 취리히를 직접 방문하였다. 불링거와 직접 대면하여 신학적 합의를 도출하려고 노력했는데, 두 사람은 만난 지 불과 두 시간 이내에 서로 합의를 이뤘다. 칼빈의 제안은 취리히 시의회에서 논의된 후에 공식적인 지지를 얻었고, 정치적인 동지애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곧바로 “협화신조” 20개 항목이 발표되었는데, 칼빈은 불링거의 용어들과 교육방식을 받아들였기에 손쉽게 합의에 도달했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와의 교통은 성령을 통해서 실현되어지는데, 믿음을 통해서 받은 것이라는 점이 핵심내용이다. 스위스 개혁진영은 견고한 통일성의 기반을 확립하게 되었다.

취리히와 제네바에서는 점차 교회의 독립권이 허용되어졌으나, 베른에서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모든 교회업무가 사실상 시의회의 결정에 따라서 좌우되었으며 특히 교회가 독자적으로 시행하는 권징을 허용하지 않았다. 베른에서는 츠빙글리에게서 영향을 받은 요한네스 할러가 루터파에게 가까웠던 스트라스부르 교회 쪽으로 기울었다.

1558년 12월, 로잔의 목회자들은 더 큰 도시인 베른 시당국의 결정에 대해서 거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베른 시당국의 반응은 즉각적인 보복이었다. 복종하겠다는 목회자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1559년 2월, 로잔의 모든 개혁교회 목회자들을 직위 해제시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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