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건강연구원 이효상 원장

한 남자가 자살을 결심하고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라고 삶의 이유를 묻자 이를 위해 철학자 윌 듀런트(Will Durant )는 이 문제를 혼자 고민할 게 아니라 당대 지성인들과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여겼다. 자신이 높이 평가하는 당대 지성인 100인에게 편지를 썼고 거기서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이렇듯 전통적으로 ‘지성인’이란,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공적인 참여와 활동을 담당할 때 그렇게 칭한다. ‘지성인’은 문인, 성직자, 철학자, 사상가, 대학교수 등 공적 담론을 이끌어 나가는 이들이다. 사회학자 칼 만하임은 이런 지성인을 가리켜 사회의 “파수꾼”(Wächter)이라 불렀다.

자발적이었건, 강요되었건 일제 강점기말 식민지 조선에서는 지식인만 넘쳐날 뿐 지성인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시국도 있었다. 그것은 다만 그때만이 아니다. 과거 혼란한 6.25전란과 민주화시절 대중들은 지식인들을 사회의 길잡이로 삼아 한 시기를 헤쳐 나가기도 했다.

1970년 이후 산업화·민주화로 이어지며 한국사회는 지성인의 현실 참여의 비중이 커졌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지성인의 사회 참여가 감당해 온 역할과 비중은 오히려 작아지고 희미해졌다. 아니, 어쩌면 지성인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을 정도인지도 모른다. 공적영역에서 무책임하며 도덕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이들을 향해 엄중히 비판하고 올바른 대안과 길을 제시하는 선지자적 지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한 가지는 치열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지성적 담론이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점이다. 지성인에 속하는 이들이 정치적 입장에 서서 지향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향한 비난과 협박만으로 그 담론을 대체하고 있다. 오늘날 지성인이 아무리 객관성과 보편성을 주장해도, 그 발언은 간단히 어느 한 ‘편’의 것으로 매도당하고 만다. 지성인들의 숙명이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하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책임윤리와 신념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며 참여할 수도 있다.

지성인의 덕목은 이성적이고 도덕적 균형 감각을 갖춘 독립된 파수꾼 역할에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지성계는 도덕적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양극화된 정치문화는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라는 갈등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친다. 강단 지성인들이 이제는 SNS와 유튜브 채널에서 활약하며 선과 악을 이분법으로 규정하고 심판하는 검사의 역할까지 하려한다. 내 편이면 옳은 선이고, 반대편은 그른 악으로 규정하는 식이다.

최근 386세대 동료를 만나보면 그새 다들 교수가 되어 있고, 수도권 웬만한 대학에선 교수연봉이 1억이 넘는다고 자랑한다. 그들은 교수는 기능이 아니라 신분. 그 신분의 유지를 위해 그들은 자기들끼리도 안 읽는 논문을 써 가며, 그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줄 궁리를 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누리는 특권은 희생양인 시간강사의 노동에 대한 착취를 통해 유지된다. 이들이 침묵하는 데에는 진보나 보수나 차이가 없다. 이른바 ‘진보적’ 지성인들은 지배층이 되었고 이미 기득권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그저 자기 계급을 대변할 뿐이다. 그들은 더 이상 문제를 ‘비판’하지 않는다. 비판해야 할 그 현실을 자신이 만들었고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계, 언론계, 문화계, 종교계 등 사회전반에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그 막강한 영향력으로 대중을 장악해 얼마 남지 않은 희미한 ‘비판’의 목소리마저 잠재우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시스템의 문제점과 허구성이 폭로되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자기들만의 지식이 아니라 서로 함께 손잡고 나갈 수 있는 그런 지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전후해서 소위 진보 지식인 그룹의 진영논리는 극심했다. 이들은 기이할 정도로 당파적 편향성을 띄었다. 특정 정당과 지역으로 나눠 한 쪽 편만 들며 상대편을 폄하하는 등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 지성인 스스로가 나서서 케케묵은 지역갈등의 망령을 되살리거나 한쪽만의 견해를 진실처럼 말해선 안된다. 반대편의 위선에 대해 말하려면 자기편의 위선도 고백해야 한다. 그것이 이성에 바탕을 둔 지성인이 지녀야 할 도덕적 의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난다. 지성인들마저 권력에 줄을 서고 손을 잡기 시작한다. ‘비판’을 사명으로 알던 진보 지식인들이 정부기관에 진출한다. 그러면서 친정부를 표방하며, SNS를 이용해 쏟아내는 정치적 발언은 살벌하기 짝이 없다. 친정부 편향적 미디어의 주장만 받고 옹호하며 SNS에 공유한다. 이런 지성인이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지지자들의 환호를 이끌어 낸다. 그들의 역할이 선동적으로 크나큰 위력을 발휘한다. 추종자들은 SNS에서 강화된 응집력으로 매스컴들과 상호작용을 발휘하며 여론을 주도한다.

언제부터인가 ‘지성인’이라는 말을 듣기 힘들어졌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실제로 지성인이나 논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혹독한 여론과 언론 앞에 고뇌하고 침묵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는 시류에 영합하는 정치인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오늘날 행동하는 지성인 중에 ‘어용’이 많다. 지성인이 침묵하거나 어용 지식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지성의 무덤이요, 지식인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자나 권력기관에 영합하며 자리를 보장받고 줏대 없이 줄서기 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어용’이라 부른다. 물론 아직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장인’이 아닌 ‘지성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더러 남아 있긴 한 것인가. 가령, 스스로 지성인이라 일컫는 성직자가 자리를 탐하거나 이권에 개입하고 비즈니스맨(businessman)으로 전락한다면, 선지자적 지성을 포기하고 이런 지식인들이 어떤 편에 서는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 이해를 대변하는 지성인은 더 이상 ‘계층’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익집단’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진보는 정치적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가치집단’으로서 진보는 죽었다”라는 진중권 교수의 지적처럼 전통적 지성인은 멸종한 것일까. 가히 지성인들에게 정치를 비롯한 공적 영역에서 도덕적·지성적으로 냉정한 평론과 진지한 토론을 찾아볼 수 없다. 이제는 전통적인 관점의 지성인은 사라져 간다.

현대 지식인은 인스타그램・유튜브・트위터 등 SNS에서 많은 팔로워・구독자를 가진 사용자나 포털사이트에서 큰 블로그를 운영하는 파워블로거 등에 영향을 미치는 ‘메가 인플루언서(Mega-Influencer)’로 형태로 대체된다. 교수・문인・성직자・철학자 등이 이 역할에 해당된다. 최근 친 정부 성향의 메가 인플루언서들은 SNS 상에서 자기만의 전문성을 지닌 ‘마이크로 인플루언서(Micro-Influencer)’들과 조응하며 영향력을 확대한다. 여기에 소위 ‘셀럽(Celeb)’이라 불리는 집단이 지식인 대열에 가세하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지식인은 많지만 이성적이고 깊은 사유(思惟)를 갖춘 지성인들은 침묵하고 자연히 사라지고 만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로『지식인의 아편』을 쓴 레몽 아롱(Raymond Aron)의 명언이 떠오른다. “정치란 선악의 투쟁이 아니다. 과거와 미래의 투쟁은 더욱 아니다. 정치란 좀 더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선택일 뿐이다. 정치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지난해 9월 소설가 황모(某)씨는 1,267명이나 되는 문인들을 모아 서명을 받고 ‘조모(某)지지’ 성명을 주도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랴. 조모(某)를 졸지에 한국의 드레퓌스, 죄 없는 의인으로 추앙받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어용’이 되어간다. 심지어 ‘어용지식인’임을 자랑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어용’이 투사가 되고, 가슴에 빛나는 훈장을 달고, 그 공으로 자리가 보장된다. 이렇게 한국 사회는 중요한 쟁점마다 선과 악 이분법으로 나뉘어 갈등과 대립, 분열의 중심에 어용 지식인들이 있다.

지성인이나 논객의 역할을 필요로 하는 난세(亂世)에 침묵하고 현실을 외면한다. 한국사회에 지성과 도덕적 윤리에 충실한 지성인이 생존하기는 한 것인가. 이 시대 지성인의 역할과 책임, 그리고 용기와 고뇌가 있는가. 권력자 헤롯이나 바로, 혹은 네로의 눈치를 보다 그 목소리를 잃지 않았는가. 가십(gossip)과 먹방(먹는 방송)으로 일관하는 언론 방송이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고 보는가. 선지자적 지성과 메시지가 사라지는 시대, 현실의 부정과 부패, 구조적 모순에 대해 누구도 바른 말하지 않는 침묵의 사회는 과연 건강한 것인가. 오늘 하늘의 소리를 듣고 시대정신을 가리키는 선지자와 예언자적 메시지는 누가 말할 것인가. 광야의 들소리처럼, 세례요한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혹독한 비난 가운데서도 작은 신음소리라도 내는 그런 지성으로 인해 역사는 치유되고 발전한다. 지성인들은 당대에 평가 받지 않고 다음 세대에 평가될 것이다. 다음세대는 지금의 한국사회와 지성인들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칼럼니스트/ 근대문화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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