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교연 상임회장 김효종 목사

코로나19가 장기화됨에 따라 국민들의 피로도가 극에 달하고 있다. 수개월째 지속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는 경제 파탄을 가져왔고, 한여름 불볕더위에 마스크 착용은 몸도 마음도 모두 지치게 만들고 있다. ‘이제 좀 여유가 생겼겠지’라며 한시름 내려놓는 순간, 어김없이 이 불청객은 또다시 발톱을 드러내며, 전국적인 감염확산의 기지개를 켠다.

아쉬운 것은 정부는 물론, 국민 스스로 모두가 힘겹게 버텨왔는데, 그 노력에 비해 코로나19의 확산이 쉽게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피로도가 쌓이고 쌓여 국민 모두가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곳곳에서 씁쓸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마스크 착용을 두고 실랑이를 하는 것이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거나, 마스크를 착용하기는 했지만 턱에만 걸친 이른바 ‘턱스크’를 두고서 말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다.

날씨가 덥다보니 지하철 개찰구를 지날 때만 마스크를 착용하고, 지하철 안에서는 마스크를 벗거나 혹은 ‘턱스크’를 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이를 두고서 코로나19의 두려움 때문에 마스크를 제대로 써달라고 했다가, 오히려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참견이냐’며 된서리를 맞는다. 모두를 위한 정의가 한순간에 오지랖이 되고, 참견이 된다. 그렇게 멈춰선 지하철은 출근길, 혹은 퇴근길 수많은 국민들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아 버린다.

결론부터 말하면 다중이용시설에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죽하면 정부가 나서서 지하철 등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탑승자체를 불가하게 만들었을까.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과 소지하는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모두를 생각한다면 내가 좀 힘들어도 마스크를 온전히 착용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다. 그럼에도 ‘내가 하겠다는데 왜’라고 한다면, 이러한 행동은 철저한 개인이기주의적 행동이라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내가 한다는데 왜 참견이야’라고 한다면 그들은 다중이용시설인 지하철 등을 애초에 이용하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은 정부는 물론 모두가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힘을 합해야 한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안일한 생각이 내 주변뿐 아니라,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 특히 코로나19라는 특별한 상황에 처한 시점에선 더욱 행동에 주의해야 한다.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고, 나아가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 필요하다. 나만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독선과 아집으로 임한다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불협화음만을 낳을 뿐이다. 내가 조금 손해보고, 내가 조금 양보할 때 비로소 이 사회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룰 수 있다.

코로나19는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 모두에게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내가 먼저가 아닌, 너와 우리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몇 개월째 계속된 사태에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서 ‘화’가 가득하겠지만, 이해와 배려로 ‘평안’을 되찾아야 한다.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분쟁과 논란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서로를 위해 나누고 헌신하는 아름다운 미담이 풍성하길 기대한다. 오직 주 안에서 이 나라 이 민족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서로 감싸주며 하나가 되어 불협화음이 천상의 하모니가 되어 울려 퍼지는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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