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 구약학 김창주 교수

수수께끼 같은 구절이다. 내 이름이 ‘그 안’에 있다니? 앞의 셔미(ימשׁ)는 ‘나의 이름’이다. 뒤의 버키르보(וברקב)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즉 전치사(ב), 전치사(ברק), 그리고 접미대명사(ו)로 된 전치사구다. 구약에 22 차례 언급되는데 물리적이나 정신적인 의미로 ‘가운데, 내면’을 가리킨다(왕상 3:28; 시 109:18). 과연 ‘그’로 번역된 접미대명사 3인칭 남성단수는 누구일까? 보통 두 가지 해석이 통용된다.

첫째는 천사로 보는 입장이다. 20절에 언급된 사자(ךלמ)로 하나님의 대리자를 가리킨다. 이 점에서 천사는 이 맥락에 자연스럽다. 유대교 일부에서는 천사장(לודגה רשׂה) 미가엘(단 12:1; 유 1:9)이나, 탈무드에 나오는 하늘의 서기관 메타트론으로 간주한다.<BT Hagigah 13; Carasik, 203> 두 번째는 토라 또는 법궤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시는 토라로 기록되었다. 그 토라는 두 돌판에 새겨져 법궤에 보관된다. 따라서 ‘나의 이름’이 토라에 들어있다고 읽는다. 이스라엘의 광야 행진에 법궤가 항상 앞장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민 10:33). 모세는 시내산 계시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강조한다. 신 현현 후에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확인하는 형식은 낯설지 않다(출 34:5-6).

또한 ‘내 이름이 그 안에’를 해석하려면 하나님 이름을 다뤄야한다. 흔히 ‘거룩한 네 글자’로 알려진 야웨(הוהי)는 구약에 6823 차례 등장한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본래 발음대로 부르지 못하고 아도나이(ינדא)로 대체된다. 영어 the LORD, 독어 das Herr, 한글 주님 등으로 읽히는 이유다. 그러나 엄밀하게 구약의 하나님 이름이 또 하나 언급되었다. 오직 네 번만 언급된 신명은 ‘에흐웨’(היהא)다. 출애굽기 3장에 집중적으로 나온다(출 3:14×3; 호 1:9). <김정철. “호세아 1:9b의 אהיה에 관한 연구,” 「신학연구」 48 (2006): 37-63.> 에흐웨는 번역본에 따라 그리스어 evgw. eivmi, 영어 I AM으로 옮기지만 음역으로 번역될 수밖에 없다. 타르굼에 의하면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에흐웨이고 ‘에흐웨 아셰르 에흐웨’는 그 의미에 대한 해설이다.<Carasik, 21> 즉 에흐웨는 어제나 이제나 언제나 늘 동일한 분이라는 뜻이다.

위에서 야웨와 에흐웨 두 신명을 확인하였다. 에흐웨의 첫 글자(א)는 알파벳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선재하심과 언제나 동일한 분을 상징한다. 야웨의 첫 글자(י)는 10번째 자음으로서 하나님의 10가지 신적인 힘 또는 신성(ספירות)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두 이름의 첫 글자는 통칭(epithet) 아도나이의 처음과 마지막 글자로 읽거나 관련시킨다. 즉 하나님은 세상의 시작과 끝이며 ‘주인’(the Lord)이다. 그분은 항상 자비로운 하나님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모세를 보내어 해방시키려는 것이다(출 3:7-8).

아도나이(ינדא)의 가운데 두 글자 딘(nd, !yd)은 정의를 대표한다. “내 이름이 그 안에 있음이라”(출 23:21). ‘내 이름’(ימשׁ)은 에흐웨와 야웨이고 ‘그 안’(וברקב)은 정의(justice)의 하나님을 내포한다. 하나님은 자비로 그의 백성을 인도하지만 또한 동시에 정의로 다스리기도 하신다. 자비와 정의의 견제와 균형이다. ‘아도나이’라는 호칭에도 두 성품이 절묘하게 들어있다. 가운데 두 글자는 정의의 하나님을, 처음과 마지막 두 글자는 자비의 하나님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본래 이름 ‘야웨’(הוהי)나 ‘에흐웨’(היהא) 대신 ‘아도나이’(ינד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아도나이가 1인칭 나에게 한정된 ‘나의 주님’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주인으로서 ‘the Lord’라는 사실이다.

위 구절은 모세가 계약법을 선포한 후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이름과 정의의 명분으로 이스라엘 회중에게 계명에 대한 순종과 계약의 실천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신 현현 장면에서 야웨의 다양한 표현이 언급되듯(출 34:6-7) ‘내 이름이 그 안에’도 하나님의 속성이 압축적으로 역설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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