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 삼일교회 담임 하태영 목사

예수께서 성소의 회랑(아케이드)을 걸으신 일이 있다. 예루살렘성소 동쪽 솔로몬의 회랑은 높이 12m의 고린도식 원주가 여러 개 서 있고, 남쪽 왕의 회랑은 직경 2m에 높이 10m나 되는 4열의 흰 대리석 원주 162개가 서 있다. 헬라 사람들은 이렇게 높이 솟은 회랑의 원주를 무너지지 않는 절대 진리의 상징으로 삼고 그곳에서 제사도 지내고, 철학을 논하기도 했다. 그처럼 웅장한 회랑이 어느 사이 예루살렘성소에도 들어선 것이다. 문제는 그처럼 압도적인 축조물을 자신들의 권위와 동일시하는데 있다. 그런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높이 솟은 대리석 원주와 같은 오만과 독선만 가득했을 것이다.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유대 지도층 사람들의 모습이 그러했다.

어떤 장소나 건축물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교회들이 다투어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지으려는 기저에는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려는 정치적 심리가 깔려 있다. 그런 심리는 결코 자기 밖에서 다가오는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 그것도 예수처럼 초라한 행색으로 다가오는 창조와 구원의 징조에 공감할 수 없다. 놀랍게도 유대 최고 엘리트이면서도 그런 회랑과 같은 권위를 배설물로 여기고 거기서 벗어난 이가 있다. 사도 바울이다. 그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유대 지도자들과는 달리 율법이라는 권위의 회랑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지금 일어나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감응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축조물인 회랑에서 벗어나야 한다. 권력, 돈, 명예, 학벌, 인맥, 권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위 세상에서의 출세는 그런 기득권의 회랑 밑에 기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희망은 인간이 쌓은 축조물 밖에서 다가온다. 그리스도인은 기득권의 회랑 안에 기어 들어가려고 억지 부리지 않고, 진실을 사모해야 창조의 징조들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오늘날 기후변화와 전염병 같은 시대의 징조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 사역에 감응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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