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 개혁선교 부총회장 강동규 목사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다. 어학사전에 의하면 ‘비록 남남끼리라도 서로 이웃하여 다정하게 지내면 사촌과 같이 가깝게 됨을 이르는 말’이다. 과거에는 정말 ‘이웃사촌’이라는 말처럼, 옆집과 뒷집, 윗집 등 모두가 가깝게 지냈다. 각 가정의 세간 살림은 물론 잡다한 집기의 개수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잊힌 단어쯤으로 여겨질 정도다. 그만큼 옆집에 누가 살든, 뭘 하든 관심이 없다. 그저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개인이기주의가 팽배해졌다.

이를 잘 대변이라도 하듯이 얼마 전 비보가 날라 왔다. 정신질환을 앓아온 모녀가 원룸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이 모녀는 엄마가 일용직 노동을 해서 얻은 수입으로 생활을 한 것으로 확인됐으며, 딸은 이웃들 중 얼굴을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집 안에서만 생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밖에도 한 아버지와 두 아들이 생활고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가 하면, 70대 여성과 40대 여성 딸 3명이 숨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모두 우리 이웃에 사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자녀였고, 누군가의 딸이자 아들이었다.

참으로 안타깝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당연하던 시절이라면 이들이 이렇게 운명을 달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혼족, 혼밥 등 개인이기주의가 사회 트렌드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이들의 죽음을 막을 방법은 딱히 없었다. 그렇게 소중한 생명의 불꽃이 꺼졌다.

누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저들은 죽은 것이 아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단 한번이라도 귀를 기울여줬다면, 소중한 생명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들의 이웃사촌은 누구였을까. 어찌 보면 그들도 저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태복음 22:37-39)라고 하셨다. 내 일과 상관이 없다고,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나 몰라라’하는 것은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가당치 않은 일이다.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모두가 서로 도우면서 살아갈 때 비로소 온전한 세상이 된다.

비록 세상이 제아무리 변하고, 트렌드가 바뀌어도 불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서로 돕고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온전하려면 내 이웃이 온전해야 한다. 이웃이 고통에 처해 몸부림치고 있는데, 내 일이 아니니까 모른 척 한다면, 그 고통은 이내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다.

이제라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에 옮겨 그동안 잊힌 ‘이웃사촌’이라는 단어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 아픔에 처한 이웃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의 고통을 반감시켜준다면 분명 우리 사회는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다.

올해 추석은 코로나19로 인해 고향방문 자체가 많이 줄어들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그만큼 소외된 이웃들의 명절 역시 쓸쓸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향방문 대신 여행을 떠나는 사치가 아닌,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에게 눈을 돌려 그들과 함께 하는 명절을 보내는 것은 어떨지 제안한다. 민족 대명절인 추석을 기점으로 ‘이웃사촌’의 붐이 일어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이 넘치는 우리 사회가 되길 진심으로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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