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김재성 조직신학교수

1884년 12월의 갑신정변을 이해하려면 먼저 조선과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서 개화파들이 미국을 방문했던 일을 상기하게 된다. 1882년 말과 1883년 1월, 미국과 조선 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되고, 1883년 5월 주한(駐韓) 미국 공사 푸트(Lucius H. Foote)가 한성에 부임했는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알렌의 후견인 역학을 잘 감당했다. 그 해 7월 고종은 임오군란 이후로 일본에 대비하기 위해서 끌어들인 청나라의 세력이 너무나 커질 것을 염려하여 이들을 견제한다는 뜻에서 미국과 관계를 개선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과 미국 사이의 상호조약 체결은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미국으로 보빙사(報聘使:답례 사절, 정사 민영익, 부사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무관 현흥택 최경석, 수행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를 파견하였는데, 주로 양반 자제들로 20대의 개화파 신진들이었다. 이들은 미국을 방문하여 먼저 당시 대통령 체스터 A. 아서(C. A. Arthur)와 2차례 회동하고 국서를 전하고 양국 간의 우호와 교역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보여준 한국식 전통 예법에 따라서 세 사람의 대표들이 왕에게 하듯이 꿇어 엎드려 절하는 모습이 대통령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고, 하도 특이해서 신문에 보도가 되었다.

미국 북장로교회에서는 1884년 의료선교사 헤론 (J. W. Heron)을 파송하기로 하였으나, 계속 외부세력을 거부하는 조선의 조정의 태도로 인해서 일본에 머물면서 입국이 지연되고 있었다. 이런 때에 알렌 선교사는 미국 대사관의 공적인 수행원이라는 자격으로 간접선교의 방법을 갖고 조선에 들어온 것이다.

구한말의 정치적 갈등 상황 속에서 직접선교만을 고집한다면 복음증거의 길을 영원히 막혀버릴 수도 있었다. 당시 외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은 앞서 언급한 바, 병인양요 이후로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외국인들이 아이들을 잡아다가 눈을 빼어 약을 만든다, 혹은 선교사들을 앞잡이로 보내어 조선을 침탈하려 한다는 등의 소문들이 퍼져 있었다. 이런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해서 보여주어야만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때로는 강풍과 같은 진노가 필요하지만, 때로는 따뜻한 봄바람이 얼어붙은 대지를 녹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에 있다. 한 사람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인해서, 작은 물방울이 단단한 벽을 허무는 첫 걸음이 되었던 것이다.

구한말 위험천만한 한반도를 기독교 선교가 가능한 토양으로 바꾸는 역사적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영웅적이요, 획기적인 사명을 감당한 의사, 뛰어난 명의, 신비한 서양사람, 알렌 선교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최선의 의료실력과 성실한 치료과정을 거쳐서 민영익 대감을 죽음 직전에서 살려냄으로써 고종과 명성황후 민비의 신임을 얻게 되면서 드디어 합법적으로 서양의 선교사가 한반도에 정착하는 기반이 조성되었고, 그곳으로부터 복음이 퍼져나가는 획기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첫째, 젊은 의사 알렌의 신앙적인 인품을 손꼽아야 한다. 의료선교의 성공요인은 최고 권력자들의 신임과 배려를 받아내었다는 것인데, 그 내면에는 의사 알렌의 소명감과 사명감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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