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 구약학 김창주 교수

구약에서 밀, 보리, 귀리, 호밀, 나맥 등은 팔레스틴의 주요 식재료다(신 8:8; 겔 4:9). 이 알곡들을 가루로 만들어 빵을 굽는다. 곡식의 종류는 달라도 ‘밀가루’라고 해두자. 히브리어 밀가루는 솔레트(חמק)와 케마흐(תלס) 두 낱말이 쓰인다. 둘의 구분은 솔로몬의 하루 양식을 소개한 본문이면 충분하다. 입자가 고우면 솔레트(fine flour)이고 굵거나 갈아야할 알곡이면 케마흐다(왕상 4:22). 그렇다고 두 낱말의 차이가 항상 명백하지는 않다. 여러 번 정제한 솔레트로 빵을 구워 손님을 접대했고(창 18:6), 소제로 하나님께 드렸으며(출 29:2,40), 무교병을 만들어 절기를 지켰다(레 2:4; 민 6:15). 또한 정성스럽게 구운 빵을 성소의 ‘순결한 상’ 위에 놓았다(레 24:5).

케마흐의 용례를 보면 주로 한두 번 빻은 가루다(사 47:2). 기드온은 미디안과 전쟁 중에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어 야웨께 예배하였다(삿 6:19). 사울은 신접한 여인의 집에서 ‘굵은 가루’로 만든 무교병을 먹었다(삼상 28:24).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다윗이 마하나임에 도피했을 때 암몬 족속이 가져온 음식물 중에 밀 보리와 함께 케마흐가 들어있다(삼하 17:28; 대상 12:41). 엘리야는 사르밧 여인의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케마흐’로 만든 음식을 먹고(왕상 17:12), 엘리사는 케마흐를 가져오게 하여 해독제로 사용한다(왕하 4:41). 사무엘이 젖을 떼고 한두 차례 빻은 가루가 케마흐였다(삼상 1:24). 본래 케마흐는 추수하지 않은 알곡이나 더 정제해야할 알갱이를 뜻한다(호 8:7).

랍비들은 토라를 곧잘 밀가루에 견주어 설명한다. 예컨대 ‘밀가루가 없으면 토라가 없고 반대로 토라가 없으면 밀가루도 없다’는 격언이 그것이다.<Pirkei Abot 3:21> 랍비들은 밀가루의 어떤 점이 토라와 유사하다고 여긴 것일까? 밀과 보리 등은 적절한 온도와 습기가 주어지면 저절로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그 열매를 곧장 음식으로 섭취할 수는 없다. 수확 이후에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기까지 몇 단계의 가공 과정을 거쳐야 한다. 추수 뒤에 우선 알곡과 쭉정이를 분류하고 건조시킨다. 다음에 절구나 맷돌에 찧어 고운 가루를 걸러내는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친다. 여기에 우유와 소금을 넣고 반죽하여 숙성시킨 후 적당한 불에 굽는다. 이렇듯 쌀을 뜻하는 한자 米에 여든 여덟 번의 수고가 깃들어있다는 해석처럼 알곡은 수많은 손길과 공정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허기를 채우는 몸의 영양소가 된다.

이스라엘에게 토라 역시 자연이 알곡을 내듯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토라를 영적인 양식으로 삼기 위해서는 알곡으로 빵을 만드는 것처럼 연구와 해석이라는 정성과 노고가 요청된다. 랍비들은 이런 점에서 토라와 말씀의 관계를 알곡과 빵의 관계로 비유한 것이다. 알곡이 없으면 토라도 없고 토라 없이 알곡도 없다는 경구는 토라 연구를 위한 체력을 갖추라는 뜻이 아니다. 저절로 맺은 야생의 알곡에서 영양소를 얻으려면 수고가 있어야 하듯 토라가 말씀이 되어 영혼의 양식이 되려면 비슷한 과정이 소요된다는 의미다. 토라를 힘써 나 자신과 연관짓지 않으면 아무런 관련도 찾을 수 없고 무의미한 글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랍비들은 토라 연구에 게을리 하지 말고 정진할 것을 거듭 강조한다. <랭커스터, 48-49>

전통적으로 랍비 학교는 학생에게 학비를 요구하지 않는다. 학생은 오직 토라 연구에 정진하고 힘쓰라는 뜻이다. 힐렐(BCE 110–CE 10)은 나무꾼으로 일하며 공부해야 했다. 학비를 못 내면 수업에 참여할 수 없었다. 어느 날 힐렐이 지붕에서 몰래 듣다가 발각되고 그의 사정을 알게 된 랍비는 수업료를 면제해주었다. 이 일로 인해서 랍비 교육은 회당과 공동체가 후원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전통은 지금도 유지된다. 한 사람의 랍비가 토라 연구와 해석에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하는지 인식하기 때문이다. 토라와 알곡의 비유는 이중적이다. 하나는 알곡과 토라가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빻아서 가루를 만들고 반죽하는 고된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날마다 음식을 섭취하듯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로 매일 필요한 양식이라는 사실이다. 자연이 사람의 수고 없이 열매를 내듯 하나님은 토라를 이스라엘에게 주셨다(출 24:12). 그러나 사유와 지성과 영적 모든 노력을 다하여 풀어내야 토라는 말씀 곧 양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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