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우드홀의 외손자 클리포트 킹과 웰본의 손녀 프리실라 웰본 초청
왕진 가방과 청진기, 선교수첩, 새디 웰본 사모 선교사 임명장 등

 

▲ 셔우드 홀과 웰본 선교사의 손때가 묻은 100여 년 전 유품이 양화진기록관에 기증됐다. (사진출처 양화진기록관)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담임 이재철 목사)는 셔우드 홀과 웰본 선교사 후손을 초청해 선교사 추모예배 및 유품 기증식을 지난 26일 합정동 소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선교기념관 2층에서 가졌다. 

이날 추모예배에서는 100주년기념재단 이사장 강병훈 목사가 설교했고,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역사 동영상 및 홀과 웰본 선교사의 업적을 회고하는 동영상을 시청했다. 이어 유품 기증식은 에스더재단 대표인 김현수 박사의 경위 소개와 클리포트 킹과 프리실라 웰본 에비의 인사, 양화진기록관 박흥식 관장의 감사장 전달,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담임목사의 감사 인사 순서로 진행됐다. 유품 기증식 이후에는 참석자 모두 셔우드 홀과 웰본 선교사 묘역을 참배하고, 헌화했다.

이날 기증된 유품은 셔우드 홀 선교사의 경우 한국과 인도 선교지에서 들고 다녔던 왕진 가방과 청진기, 해주 지방 교역자들이 보낸 감사 편지이며, 웰본 선교사의 경우는 결혼증서를 비롯해, 결혼사진, 1901년 서울 사진, 선교수첩, 나막신, 가족사진, 성경, 여권, 새디 웰본 사모 선교사 임명장 및 지침서 등이다. 

이와 관련 이번 양화진 안장 선교사 후손 초청 추모예배 및 유품기증식에 초대된 클리포드 킹 씨는 셔우드 홀(1893~1991) 선교사와 그의 아내 마리안 홀(1896~1991)의 네 자녀 중 쌍둥이로 태어난 막내딸 필리스 마리안의 외아들로, 셔우드홀의 외손자다. 프리실라 웰본 여사는 양화진에 안장된 웰본(H. G. Welbon, 1866~1928) 선교사의 손녀로, 웰본 선교사 장남의 쌍둥이 딸 중 동생이다.

이날 저녁 8시에는 선교기념관 앞 야외무대에서 선교사 후손 초청 제12회 양화진음악회가 열렸다. 이번 음악회에는 뮌헨 국립음대 이미경 교수와 세계적인 오보에 연주자 니콜라스 다니엘, 그리고 탤런트 정 준 씨가 나레이터로 출연해 바흐, 헨델, 모차르트, 그리그, 나단 밀슈타인, 조지 거쉬인 등의 클래식 음악과 엔리코 모리꼬네의 영화 <미션> 주제 음악 등을 들려 줬다.

  한편 셔우드 홀은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910년 미국으로 돌아가 오하이오 주의 마운트 유니온대학에서 마리안을 만났다. 그 이후 마리안과 의사가 되어 1926년 4월 미국 감리회 의료선교사로 내한해 일제에 의해 추방당한 1941년까지 의료선교사로 헌신했다. 셔우드와 마리안은 1926년부터 황해도 해주 구세병원에서 의료선교사역을 시작했으며, 1928년에는 해주 교외에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용양소인 구세요양원을 설립했다. 이후 그들은 당시 한국의 최대 전염병 중 하나였던 결핵퇴치를 위해 온힘을 기울였고, 특히 1934년부터는 결핵퇴치운동의 확산을 위해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해 결핵퇴치운동의 전기를 마련했다. 셔우드 홀은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던 1940년 일제에 의해 친미간첩 혐의로 연행됐다가 복역 중 1941년 11월 추방되었다가 인디아로 건너 가 그곳에서 1963년까지 의료선교사로 결핵퇴치운동을 벌인 후 은퇴했다. 1978년에는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정리한 회고록 <닥터 홀의 조선회상>을 펴냈으며, 1993년 11월에는 대한결핵협회가 셔우드 홀 선교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는 공적비를 세웠다.

프리실라 웰본 여사의 할아버지인 웰본 선교사는 원주, 안동, 대구 등 우리나라의 오지에 복음을 전한 개척 선교사이다. 웰본 선교사는 1866년 8월 미국 미시건 주 이스트맨빌에서 태어나 매칼레스터대학과 샌프란시스코신학교를 졸업한 후 1900년 10월 미 북장로교 해외선교사로 내한했다. 1년 뒤 1899년부터 조선에서 복음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던 사라 선교사와 결혼했다. 이후 1909년까지 서울 선교부에서 사역하며 YMCA 설립위원으로 기여하는 한편 철원과 원주 지역 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그해에 북장로교 안동선교부 대표 선교사로 임명되어 8년간 안동 지역에서 활동했다. 안동선교부 개설 당시 60교회, 3,000명이던 안동지역 교세가 1922년에 122개 교회,7000명 교인으로 성장하는 데는 웰본 선교사 부부의 공헌이 작지 않았다. 그 이후 웰본 선교사는 2년 동안 평양에서 선교하다가 아내의 건강이 나빠져 1919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3년 만에 다시 홀로 내한했다. 그러나 대구와 안동선교부에서 활동하던 중 1928년 과로로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웰본 선교사의 6남매 중 태어난 지 10일 만에 사망한 첫째아들 하비(1903년)와 3살 때 사망한 막내딸 앨리스(1914년)도 양화진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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