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 한국을 위기에서 구출해낸 복음

하나님께서는 가장 불쌍한 처지에 있던 한국사람들을 건져주시고자 복음을 들려주셨다. 지난 130년 동안 기독교는 한국인들에게 위로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무지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돌보아 줄 사람은 천지에 아무도 없었다. 멸망해 가는 조선을 구해주며 도와줄 강대국은 없었다. 최초의 서양 선교사 알렌이 1884년 9월 20일 입국한 이래로, 기독교는 혼돈 속에서 방황하던 한국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춰주었다. 알렌은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제일 장로교회 출신으로 미국 북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았다. 25세의 젊은 의사로 주한 미국 공사관에 근무하는 조건으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는 마이애미 의과대학원을 졸업한 뒤 세계 복음화에 헌신하여 중국 산둥지방에서 이미 1년여 사역을 했었다. 알렌을 통해서 서양의술에 접하게 된 고종과 민비는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고, 일제의 강압 속에서도 한국인들은 굳세게 살아났다. 1940년대 초반에 일본의 간악한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서 싸웠던 선교사들은 추방을 당했으나, 그들이 남긴 고귀한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의 혼돈 속에서 흔들리는 한국의 내일을 지켜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셨고, 어리석은 우상숭배와 죄악을 깨우쳐 주었다. 곳곳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만연한 질병에서 죽어가는 생명들을 구해주었다. 여성들의 교육과 고아원 육성, 건전한 사회조직을 건설하였다. 술과 타락에 멍든 나라를 고쳐주었고, 허망한 체면문화와 전혀 근거 없는 무속신앙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선교사들은 생활의 진실함을 추구하는 기독교 윤리와 배움에의 에너지와 열정을 심어주었다. 21세기를 맞이하여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기까지는 기독교가 전해준 복음운동이 있었던 것이다.

나의 부모님 세대들은 하나같이 험악한 세상을 이겨내야만 했었다. 혼돈과 빈곤 속에서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었다. 일본의 식민지 강탈이 자행되던 시대에 한반도는 일부 소수 친일파의 천국이었다. 대부분 가난한 농업에 매달려서 겨우 굶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시대였다. 농촌에서 생산하는 것들은 가족들의 생계수단에 불과했으니, 가정형편상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갖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다. 변변한 옷가지마저도 없던 시대였고, 주택이나 의료 환경은 거의 피난민 수준이었다. 일제통치 하에서 대학교에 진학하여 청소년의 꿈을 가꾸며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반도에 살면서 견뎌낸 시대는 참으로 험악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한국인들의 삶에는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독립을 염원하면서 견뎌냈던 갖가지 희생정신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모세대와 기독교를 받아들인 신앙인들이 물려주신 정신적인 유산은 한국의 근대사 속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휘하고 있다. 안중근 열사처럼 목숨을 바치지는 못했지만, 가녀린 여학생으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독립과 자주정신을 갖고 몸부림치던 분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었다. 국민계몽과 선각자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분들의 희생정신, 3.1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기독교 지도자들이 월남 이상재 선생을 비롯하여 신사참배에 거부하여 순교했던 주기철 목사, 고당 조만식 장로, 안이숙 여사 등의 순교신앙, 극렬한 공산주의 이념과의 투쟁에서 숨져간 손양원 목사와 두 아들, 동족 간에 치룬 6.25동란과 이산가족들의 절규, 극심한 가난을 참고 이겨내야만 했던 고난의 체험이 깊이 배어있다. 급속한 재건기에 맞닥트린 군사독재와의 투쟁, 민주화 운동, 산업화와 도시 중심의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엄청난 혼란기를 견뎌내야만 했었다. 특히 가족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주신 창세기 족장들의 험난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는 인생의 절실한 행복조건이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 역사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특별한 축복이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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