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 호 관 목사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말 그대로 하늘은 높푸르고 들판 그득히 결실이 넘실댄다. 따가운 햇볕이 이토록 고마울 데가 없다. 가을 하루 볕이 볏섬을 불구고 익어가는 가을 나무에 힘을 싣는다. 익어가는 실과들과 누렇게 물들어가는 황금 들판을 보면서 인생 결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유명한 씨 뿌리는 비유에서 100배의 결실을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2, 3배만 돼도 적잖은 이속을 챙긴 것이고, 농군의 소출이 이 정도라면 결코 밑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100배의 수확을 한다는 것은 씨앗의 조화도 아니고, 토양의 덕은 물론, 농업기술의 문제도 아니다. 단 한 가지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의 은총 외에는 답이 없다.

무서운 가을 태풍에게 일격을 당하고 비틀거리는 아베의 일본 땅을 우리는 보고 있으며, 그 땅을 진동하는 뼈아픈 신음소리를 듣고 있다. 엊그제 미국 캘리포니아의 쌍둥이 산불은 적잖은 사망자를 내었고 2만 3천여 명이 집을 버리고 대피하였으며 보금자리 435동, 2곳의 아파트 단지, 10곳의 상업시설, 그리고 지역 발전소가 소실되거나 파괴되었다는 소식은 듣는 이들의 귀를 의심하게 한다. 그런데 이 땅은 평화에 풍요를 더한 가을을 노래하고 있으니 이런 결실도 있다는 말인가? 시끄러운 정치권이나 부끄러운 교계만 바라보면 이런 가을이 오히려 신기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복 주심이 아니고는 이런 가을을 맞이할 수 없다.

어떻게 우리 삶이 100배 결실의 기적을 이룰 수 있을까? 결실은 우선 좋은 땅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네 종류의 밭을 제시하셨다. 길가, 돌밭, 가시 밭, 그리고 옥토가 그것이다. 백배의 결실이 있는 삶을 기대한다면 무엇보다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 심보가 좋지 않으면서 어찌 결실을 원한다는 말인가? 놀부 심보라는 말을 가끔 듣고 또 쓰기도 한다. 길가와 같은 마음이 그렇다. 사람들의 발길에 다져진 굳은 땅에서 무슨 결실을 기대하겠는가?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진 씨는 쉽게 싹을 내지만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뜨거운 바람이 싹을 말리고 만다. 얕은 뿌리로는 백배의 결실을 기대할 수 없다. 얕은 생각이나 얕은 지식에서는 절대로 쓸 만한 열매를 얻을 수 없다. 기름진 땅에서 자라는 가시나무는 왕성하게 자라기 마련이다. 그 사이에서 자라난 씨는 고단하다. 결실까지는 너무 많은 아픔이 그를 괴롭게 한다. 허나 기름진 땅에 떨어진 씨는 잘도 자라서 마침내 백배 결실을 보는 것이다. 좋은 땅! 비어 있으면, 공터로, 빈 땅으로 남아 있으면 거기서 무슨 결실이 있겠는가? 씨를 심어야 한다. 그것도 좋은 씨가 뿌려질 때 싹이 나고 자라서 백배 결실하는 것이다. 좋은 씨! 그것도 좋은 땅에 뿌려지고, 심어진 씨가 백배결실의 종결자라 할 것이다. 좋은 땅에 뿌리고 심을 좋은 씨는 말씀이고 말(言語)이다.

구원의 복된 소식인 복음은 곧 좋은 씨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의 복 받은 대한민국은 복음의 씨가 맺은 결실이 아니라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복음은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에 심기만 하면 백배결실은 당상이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 들으시는 것은 성도의 기도이다. 기도가 좋은 씨라는 말이다. 축복의 밭에 뿌린 기도의 씨는 틀림없이 백배결실로 돌아온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는 것처럼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를 유의하여 들으신다. 그의 입에서 토해낸 말대로 된다는 것은 마치 좋은 밭에 심은 씨와 같이 결실로 나타난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말이 씨 된다.’하지 않았던가?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씨라면, 그 말이 백배의 결실을 맺게 된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어떤 언어로서 우리의 좋은 밭을 채울 것인가? 비방과 비난의 말 대신 한 마디 칭찬의 말은 어떨까?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질 않는가? 축복의 말은 듣기에도 좋다. 축복하는 그 순간만은 비뚤어진 마음이나 생각이겠는가? 평안을 빌라 해당되면 그 에게 그 평안이 임할 것이로되 그렇지 않으면 네게로 올 것이라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감사의 말은 감동을 준다. 만보 걷기보다 효과 있는 건강법은 다른 게 아니라 일일 백번감사라고 나는 믿는다. 하루에 백번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삶에 백배결실은 틀림이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예장개혁 증경총회장·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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