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사회학자인 모리 교수는 정신병원에 근무하면서 환자들을 관찰하고, 치료 과정을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 그가 관찰한 환자 가운데 중년 여 환자가 있었다. 그녀는 매일 방에서 나와 차가운 타일 바닥에 얼굴을 박고 엎드려 몇 시간이고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는 으레 그러려니 하고 그녀에 대해 무관심했다. 모리 교수는 그것이 너무 슬펐다. 그래서 그녀가 엎드려 있는 바닥에 함께 앉아 있기도 하고, 같은 자세로 엎드려 있기도 했다. 그러든 어느 날 그녀가 원하는 것은 보통 사람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기가 거기 있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는 것이다. 마침내 모리 교수는 그녀를 일으켜 방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모리 교수가 관찰한 대부분의 환자들은 거부당하고, 무시당하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연민을 기대했지만, 사람들에게 연민 따위는 없었다. 의사나 간호사들은 자기들이 익힌 치료 방식에 따라 환자를 기계적으로 대할 뿐, 환자가 진정으로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는 관심이 없었다.

예수님 당시 문둥병자들도 같은 처지였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친교로부터 거부되고, 인간관계로부터 격리됨으로써 극심한 차별과 냉대 가운데서 살아야 했다. 부정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사람이 예수께 나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이 예사롭지 않다. 마가는 예수께 나아오는 그의 모습을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막 1:40). “예수께 나아와”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모두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자의 행위이다.

그런 문둥병자를 예수께서는 “민망히 여기사” 깨끗하게 해주신다. ‘민망히 여기심’이야말로 예수의 성품을 꾸밈없이 드러낸다.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는 어떤가?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치유하기 위해 스스로 불결에 오염되고 있음이다. 마가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께 나아오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그의 불결을 개의치 않고 손을 붙잡아 주신다. 당시 유대교의 하나님, 인간의 고통 따위에는 관심도 없고, 율법 조목만을 내세우는 하나님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우리 시대에도 그런 하나님이 그립다.

삼일교회 담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기독교라인(대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