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세상에서 가장 예쁜 우리 아이들이 한꺼번에 사라졌습니다. 아침마다 저를 깨워 주고, 놀아 달라고 했는데 이젠 모든 꿈이 사라졌고, 살아갈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2일(현지 시간) 터키 휴양지 보드룸의 해변에서 모래에 얼굴을 파묻은 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전 세계가 슬픔과 분노에 빠진 가운데 아버지 ‘압둘라 쿠르디’씨(40)는 3일 터키의 한 병원에서 아이의 시신을 기다리며 울부짖었다. 그의 가족은 이슬람국가(IS)와 쿠르드족 민병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시리아 북부 소도시 코바니 출신이다. 이들은 작은 보트를 타고 바다 건너 그리스 코스 섬으로 항해하던 중 거센 파도에 배가 뒤집히면서 변을 당했다. ‘아일란’이 발견된 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엄마(35)와 형 갈립(5)의 시신도 발견됐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전 세계 애도 물결 넘쳐 났다. ~ ‘아일란’의 이름을 따 개설된 모금 펀드에 하루 만에 수천만 원이 걷히는가 하면, 난민 수용에 가장 완강한 태도를 보인 영국에선 난민 수용을 합당한 수준으로 늘릴 것을 촉구하는 탄원서에 시민 22만5000명이 서명했다. 시민들은 서명을 하면서 ‘난민을 환영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손에 들고 사진을 찍어 트위터를 통해 공유했다.

사진 한 장이 몰고 온 유럽인들의 인식 변화는 유럽 각국의 난민정책을 변화시키고 있다.

한편 외신들은 해변에서 익사한 아이의 사진 한 장이 난민 수용 문제 논의의 흐름을 바꿔놓고 있다면서 1972년 6월 베트남전쟁 당시 네이팜탄 폭격으로 온몸에 화상을 입고 알몸으로 거리를 내달리는 소녀 ‘킴푹’ 사진의 충격에 비견할 만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당시 이 사진은 어떤 기사보다 생생하게 베트남전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려 반전(反戰)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중략. (출처:http://news.donga.com/ 파리=전승훈 특파원)

아이를 안고 달리는 난민의 걸어 넘어뜨리는 한 여기자, 이를 잘했다고 박수하는 자들, 이 같은 일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행해지지 않도록 하자. ‘아일란’이 참극(慘劇)이라면, ‘세월호’를 사고(事故)라고만 말해서야 되겠는가?

대한민국 언론도 ‘아일란 쿠르디’로 인해 시리아 난민문제에 대한 보도를 연일 쏟아 부었다. 물론 이와 같은 아픈 사건으로 인하여 “인간이 동물들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과 함께 “인간은 인간다워야 한다.”고 외치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되새겨 보게 하는 계기가 됨으로, 더불어 살아가자는 외침이 드높아지기도 한다. “정부 제3국 난민 직접 데려온다.”는 제하의 보도가 1면 톱으로 장식됨과 같이(국민일보 2015. 9. 21 자), 인권국가인 우리 대한민국도 난민문제에 발 빠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아일란’의 사진 한 장이 수많은 사람의 눈시울을 뜨거워지게 했는데, ‘세월호’와 함께 싸늘한 바다 속에서 나오지 못한 우리 모두의 자녀들에 대한 생생한 동영상을 보며 그토록 쏟아내던 눈물과 분노가 말라 가고 있다는데 가슴이 아프다. 아이를 안고 달리는 난민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한 여기자와, 이를 잘했다고 박수하는 자들, 이 같은 일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행해지지 않기를 기도하며, ‘아일란’이 참극(慘劇)이라면, ‘세월호’를 사고(事故)라고만 말하지는 말자는 주문과 함께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과연 우리는 무슨 일로 울고 있을까?”를 생각하며 무릎을 꿇는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계 21:27)

한국장로교신학 학장/ 본지 논설위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기독교라인(대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