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다산 정약용은 정조의 충신이자 생각이 통하는 벗이었습니다. 사상이 같고, 의학, 실학, 지리학 등에 매우 능통했던 정약용을 정조는 매우 총애하였습니다. 역사상 매우 완벽한 성군과 현신, 즉 두 천재의 역사적 만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조와 정약용은 어느 날 한자내기를 하였습니다. 같은 글자 셋을 모아 한 글자로 만든 한자를 누가 많이 아는가 하는 내기였습니다. 각자 종이에 한자를 쓰고 나서 정조가 먼저 답을 말하였습니다.

 “계집녀(女)를 셋 모으면 간사할 간(姦), 날 일(日)을 셋 모으면 밝을 정((晶), 물 수(水)를 셋 모으면 아득할 묘(淼), 나무 목(木)을 셋 모으면 나무 빽빽이 들어설 삼(森), 돌 석(石)을 셋 모으면 쌓일 뢰(磊), 입 구(口)가 셋 모이면 뭇 품(品), 불화(火)가 셋 모이면 불 꽃 염(焱), 벌레훼(虫)가 셋 모이면 벌레 충(蟲), 털 모(毛)가 셋 모이면 솜털 취(毳), 귀 이(耳)가 셋 모이면 소곤거릴 섭(聶).....,” 정조의 답은 이어졌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정약용은 이내 빙긋 웃으며 말하였습니다. “과연 전하께서는 훌륭하십니다. 그렇지만 전하께서 한자만은 소인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자전에 있는 모든 자를 다 암기 하였는데 한자가 미치지 못할 것이라니” 이내 두 사람은 서로가 쓴 답안지를 교환하여 보았습니다.

 과연 정약용의 말대로 정조가 쓴 글자가 정약용의 것 보다 한 자가 모자란 것이었습니다. 정조께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 한자는 바로 석 삼(三)자 였습니다. 너무나도 쉬운 한자였기에 그만 빠뜨리고 만 것이었습니다. 이에 모자란 한자를 본 정조와 정약용은 무릎을 치며 크게 웃었다고 합니다.(출처 : 다산 정약용 유적지, 이야기 안내판)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을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태복음 7:26-27).

석 삼(三)자를 통해서도 우의를 다지는 ‘정조’와 ‘적약용’에게서 기본이 진리요, 기본에 충실 한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요, 충실한 자임을 생각해 보면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꼭 잊지 말아야할 기본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해본다면, 그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이라 할 것입니다.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저 목적된 성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성과가 어느 정도 이루어 졌다고 생각 할 때 역시 그 과정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럼으로 고문과 학살이 있다 해도 그 공적(功績)의 소리로 성공 운운하는 간신배들이 설쳐댐으로 충신은 찾아 볼 수 없고, 주변 사람들마저 그 공포에 질려 방향감각을 상실함으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소리 없이 숨어버립니다.

가톨릭(천주교)은 탐심을 위해 고문 학살. 콜럼버스는 남의 땅을 빼앗으려고 고문 학살, 히틀러는 세상을 지배하려고 고문 학살, 일제는 세상을 탈취하려고 고문 학살, 북괴 ‘김정은’은 체제유지를 위해 고문 학살, 이반 뇌제(雷帝)는 왕권을 위해 아들을 때려죽이기 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고문이나 학살은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그 영향이 미치지 않는 다고해서 고개를 돌리거나, 아무런 거리낌 없이 동의를 보내기 까지 하는 어리석음은 버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고문, 살인, 학살한 자가 가장 어리석은 자요, “인간의 존엄성 회복에 심혈을 기울이는 자”가 “지혜로운 삶을 누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장로교신학 학장/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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