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응하는 반면, 인간은 탐욕과 욕망에 길들여진 나머지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기에 급급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같은 창조신앙이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현대교회에서 퇴색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의 창조신앙 회복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자연의 관계회복과 합치가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오늘 한국교회는 창조신학과 신앙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인간을 지배하며, 인간 위에 군림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서, 자연을 지배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균열시키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다.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 자연과 인간, 피조물과 피조물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만이 무너지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전할 수 있다. 종교개혁 498년을 맞아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해 진단해 본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나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몸이 자연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은 흙에서 나온 채소와 곡식을 먹고 생활한다. 하나님은 흙과 햇빛, 그리고 물과 바람을 가지고, 나뭇잎을 만들어 내고 아름다운 꽃들과 열매, 그리고 곡식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인간이 생활하는데 있어 가장 큰 선물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고마워 할 줄 모르고, 욕망과 탐욕의 바벨을 노래하기에 바쁘다.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흙으로 빚어진 자연 속에서 자연물을 섭취하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리고 산소를 마시고, 호흡하며, 살아간다. 푸른 잎은 자연의 생태계를 지탱해 주는 가장 기초적인 양식이며,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원소이다. 모든 초식동물은 풀잎을 먹고 산다. 한마디로 풀잎이 없으면, 모든 생명의 존재는 불가능하다.

푸른 잎사귀는 생명체를 지탱해 줄 뿐만 아니라 깨끗하고 영원한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나뭇잎 모두는 푸른빛을 띠고 있다. 바다도, 강도, 하늘도 모두 푸른빛을 띠고 있다. 때문에 푸른 잎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젊음, 영원한 순수를 상징하기도 한다. 사상가 함석헌 선생은 “진리는 푸르다”고 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도 “푸른 잎사귀가 인간을 구원 한다”고 노래했다.

예수님도 “저 들꽃을 보라”고 했다. 그것은 분명 자연과 인간의 화해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인간에게 생기와 희망을 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저 들꽃을 보라”는 교훈 속에는 탐욕이 가득하고, 폭력이 난무하며, 불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을 향한 메시지임에 틀림없다.

특히 오늘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한국교회를 향한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사실 한국교회의 면면을 살펴보면, 희망을 노래하는 푸른 잎사귀를 구경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교회는 회칠한 무덤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맘몬과 탐욕의 모습이 교회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고난의 십자가는 호화로운 장식품이 되어버렸다. 세상 속에서 빛도 잃어버렸다. 분명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닐 것이다. 십자가는 건물의 꼭대기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등에 지는 것일 것이다. 과연 오늘 그리스도인들 중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교회를 향해 예수님은 “저 들꽃을 보라”고 했다. 들꽃은 욕망도, 폭력도, 거짓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끝없는 욕망과 끔찍한 폭력, 불신이 가득한 나머지 어디에서도 온갖 고초를 이겨내고 핀 들꽃을 찾아볼 수 없다.

▲ 하나님의 창조신앙 회복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서 가능하다.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

끝없는 인간의 욕망과 폭력은 세계 여러 곳에서 난민을 만들어 냈다. 과부와 고아, 그리고 유랑민도 만들어 냈다. 한마디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며,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다. 이러한 탐욕과 욕망은 결국 인간의 근심과 걱정도 만들어 낸다. 이것 역시 끝이 없다. 이것이 바로 동물과 다른 점이다.

동물들은 욕망의 한계가 분명히 있다. 동물들은 성욕도 발정기에만 느낀다. 먹을 것과 잠자리도 필요이상을 넘지 않는다. 개체의 욕구보다 종족의 본능을 따른다. 끝없는 인간의 욕망은 폭력을 낳고, 탐욕을 낳고, 수많은 사람들의 사지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성폭력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이로 인해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선물인 가정이 파괴되고 있다. 이 같은 범죄는 교회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 욕망과 탐욕 때문에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맘몬과 바벨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그리고 목사를 절대화시키는 종교집단주의가 곳곳에서 창궐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를 절대화하는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끝없는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한국교회 역시 타락한 중세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들은 “돼지 갖다”, “사자처럼 포악하다” 등등 짐승들을 향해 욕하기에 바쁘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이해하지 못한 오류에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짐승들의 욕망은 자연법칙에 순응하며, 자연 질서와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욕망은 무한하며, 자신을 절대화시킨다. 그러면서 하나님 중심, 이웃중심으로 산다고 위선자적인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한마디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자연조화를 깨뜨리며,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교회는 무엇이라고 변명 할 것인가(?) 교회의 중심을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 한, 교회의 중심을 이웃과 나누지 않는 한, 한국교회는 희망이 없다. 이에 대해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 모두가 동의하면서도, 교회중심, 자기중심의 절대화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전국 방방곡곡의 교회에서 다툼의 소리, 경쟁적인 맘몬과 바벨의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다. 언제인가는 몰라도 한국교회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렀다. 종교개혁 498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오늘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목회자들을 향해 종교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상업자본주의에 길들여진 한국교회는 이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맘몬과 바벨의 노래 소리를 높이기에 급급하고 있다.

끝없는 욕망과 폭력 언제까지

현대인은 텔레비전 광고와 호화로운 백화점 등 세상적인 것을 통해 끝없는 욕망을 배웠다. 여기에 사로잡히면 하나님도, 친구도 없다. 그리고 자기만을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발생한 근심과 걱정, 자기문제에 대한 염려는 끝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현대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곧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고, 이웃의 아픔에 아랑곳 하지를 않는다. 오늘 한국교회를 보라. 이웃교회와 이웃교단, 이웃종교에 대해서 존중하지를 않고, 다툼의 불씨를 남기고 있다. 탐욕의 상징이 되어버린 십자가탑을 높이는데 경쟁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것은 분명 사랑이 없는 교회이며, 실천 없는 교회이고, 희망 없는 교회이다.

오늘 왜 한국교회에서 교인이 떠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한국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했을 당시 크게 부흥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종교집단주의로 변질되면서,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부자가 되었으며, 부자들을 위한 교회로 변질되었다. 즉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교회들 마다 이들의 정서에 맞게 교회당을 호화판으로 건축하기 시작했고, 교회 내부도 이들의 정서에 맞게 장식했다. 또 목회자와 가진 자를 절대화 하는 종교집단주의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작은 교회들은 뿌리를 내릴 토양을 잃어버리고, 문을 닫기 시작했다. 어느 목사는 “300명 이하로 모이는 교회는 교회도 아니다”고 했다. 이 쓰레기 같은 말은 “저 빈들의 들꽃을 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말이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 자기중심에 빠진 목회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는데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저 들꽃을 보라”는 교훈은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한국교회의 교인들에게 인간의 본문을 일깨워주고도 남음이 있다. 탐욕과 욕망을 버리고 자연과 어우러져 사는 것, 자연과 합일에 이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존중하는 평화로운 공동체, 복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과 인간의 화해, 자연과 인간의 화해,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라는데 교회가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창조신앙이 어떤 진리를 우리에게 열어주는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 한신대 교수 박재순 목사는 자신의 저서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1998년 도서출판 천지) ‘하나님의 창조’에서, “한마디로 올바른 세계관을 갖게 해 준다. 천지 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선하고 아름답다. 천지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묘한 솜씨와 선한 뜻을 헤아릴 수 있다. 이름 없는 들 꽃 하나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스며 잇고, 하나님의 신비가 서려 있다”면서, “하나님이 천지를 지었고 보기에 좋았다고 한 것처럼, 우리는 천지 만물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창조 세계를 긍정해야 한다. 물질세계를 천시하거나, 약한 것으로 보는 것은 창조신앙과 거리가 멀다”고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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