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노아에게 셈, 함, 야벳 등 세 아들이 있다. 에덴동산에서는 여자인 하와가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는데, 대홍수사건 이후 노아의 이야기에서는 여자는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창 9:18-29). 이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확립된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라는 기술은 노아가 농사를 지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세 아들의 권력구조를 말하기 위함이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들었는데, 노아의 이 경박한 행위는 아들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선악과 구실을 하게 된다. 아비의 하체를 본 함은 이를 수치로 여기고 두 형제에게 고자질한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비의 수치를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으로 다가가 아비의 하체를 가려준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자초지종을 알고 세 아들과 그 자손들에게 각기 복과 저주를 내린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의 종들이 되기를 원하노라” 가나안은 아비의 수치를 들춰낸 함의 후손으로 아비의 죄를 그 자손들이 물려받게 된다. 그것도 그 형들의 종의 종이 되게 한다. 셈에게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노라” 라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셈의 복을 명시한다. 셈을 직접 축복하지 않고, 셈이 섬기는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하나님은 셈족의 신임을 말하는 것이다. 야벳은 창대케 하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한다. 이는 셈의 하나님으로 인해 누리는 복을 함께 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류는 셈 족속과 야벳 족속과 그리고 노예가 되어 이들을 섬기는 함의 후손인 가나안 족속으로 구분 짓게 된다.

우리가 창세기를 읽다보면,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부르기도 하고, 야훼로 부르기도 하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그 대략을 살펴보면 야훼는 평등주의적인 성향이 있다. 정의를 외치는 예언서는 주로 야훼의 말씀이다. 그러나 엘로힘은 창조신으로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번영하는 세계관을 보이고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우월주의, 종족우월주의, 성우월주의, 종교우월주의, 신분우월주의 등이 여기에 근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놀랍게도 20세기 말까지도 인종우월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미국의 경우 백인의 흑인에 대한 우월주의는 지금도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기독교우월주의가 상당한 한국교회는 어떤가? 어쩌면 야훼 하나님보다 엘로힘 하나님을 더 가까이 섬겨서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를 위해서는 야훼 하나님을 더 가까이 섬겨야 하지 않겠는가!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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