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나타난 여성, 소외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역사적 사건의 완성자로
기독여성, 남성 지배이데올로기에 파묻혀 역사현장의 중심에서 밀려나기도
수적 우위에도 기독여성 대부분 교회 내에서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


여성의 위치가 크게 달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유독 한국교회에서만 여성의 위치가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그것도 기독여성이 전체 교인의 60%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교회내에서 여성의 위치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것도 여성대통령이 나오고, 여성 국회의원이 민의를 대표하고, 군에서 여성장교들가 배출되고, CEO로 활동하는 여성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뿐만아니라 사회각분야에서 여성의 활동은 남성 못지 않게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헌데 가장 민주적이며, 깨어났다고 자랑하는 한국기독교내에서의 여성이 가야 할 길은 멀고 험하기만 하다. 이것은 분명 남성중심의 지배이데올로기와 사업자본주의의 식민지신학에 길들여진 한국교회의 현주소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여성

세계의 모든 역사는 남성중심에서 쓰여 졌다. 그것은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신구약성서 66권 중 이방인인 여자의 이름을 타이틀로 붙인 ‘룻기’과 선지자인 에스더의 이름을 붙인 ‘에스더’ 2권뿐이다. 룻기서는 룻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보아스가 룻기서의 중심에 있다. 그것은 언제나 목소리가 큰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목소리는 한마디로 생각이고, 행동이며, 역사이다.

그렇다. 어떤 역사이고 간에, 남성을 움직인 사람은 여성이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오는 드보라는 장수 야엘을 움직여, 전장을 승리로 이끌었다. 광야의 시대를 마감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역사적인 순간에 창녀 라합이 역사의 중심으로 나온다. 다윗과 맞장을 뜬 미갈도 있었다. 이렇게 성서에 나타난 여성들은 가장 천한 곳, 소외된 사람들이 역사의 중심에서 하나님과 함께 구원의 역사를 완성시켰다.

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웃나라 여인이었다. 라합은 사회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창녀였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왕들을 조정한 사람 역시 여성이었으며, 하찮은 존재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조의 애첩 장희빈 역시 하찮은 나인이었다. 위대한 인물의 뒤에는 항상 여성인 어머니가 있었다. 숭실대학교 구미정 교수는 이들을 <핑크빛 리더>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기독교 역사 속에서 여성들이 소외되고 있는 것은, 남성중심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자리를 잡고, 남성중심에서 역사가 쓰여 졌기 때문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다. 분명한 것은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고, 성미를 내 가난한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었던 사람이 바로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 이들은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한 독립운동의 최전방에 있었다. 3.1만세운동만 보더라도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3.1운동의 주체는 분명 한국기독교지도자들이 아니었다.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민족대표 33인중 기독교인 16인은, 식당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일본 경찰이 오기를 기다리는 비겁함을 보였다.

▲ 성서나, 우리의 역사에서 기독여성은 항상 소외되어 왔다. 그것은 역사가 남성에 의해서 쓰였고, 교회가 남성지배이데올로기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체는 <핑크빛 리더>

그럼에도 3.1운동이 전국방방곡곡으로 번져 나갈 수 있었던 힘은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기독여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독여성들은 상경했다가 고향으로 내려온 학생들을 도와 만세운동의 현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마음껏 외쳤다. 과연 3.1만세운동이 당시 교인 대부분을 차지했던 기독여성들이 없었다면 가능했겠는가(?) 일본군국주의와 패권주의의 부활 움직임이 일고 있는 오늘, 한국교회는 당시를 되집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기독여성들은 한국교회 남성지도자들이 일본국가주의에 굴복하고, 조선의 여성과 청년들을 향해 일본 정신대와 일본군에 입대해 황국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라고 외치고 다닐 때, 힘겹게 아리랑고개를 넘는 조선의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떠나는 독립군들을 위해서도 기도로 용기를 주었다. 분명 한국교회의 여성들은 나라와 민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나라와 민족을 가슴에 끌어안고, 하늘을 향해 간청했다. 6.25한국전쟁 당시에도 그랬고, 전쟁과 식민지 아래서 고통당하는 민족을 위해서도 그랬다. “피압박민족을 굽어 살펴 달라…”, “가난과 질병, 그리고 관에서 이제 해방시켜 달라”고 말이다.

문제는 이들이 민족의 역사와 기독교의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종교 간의 형평성을 요구하고 나섰다. 어찌 보면 당연한 요구이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지배자, 상업자본주의적 입장에서 한국교회사를 만들어 낸 이 마당에, 어찌 보면 생뚱맞은 요구가 아닌가 싶다.

과연 한국교회가, 온갖 박해와 차별 속에서도 눈물로 나라와 민족, 그리고 교회를 일으키는데 중심에 있었던 기독여성들에 대한 역사적 조명을 현란하게 해 보았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기독여성들의 민족민중운동은 상업자본주의의 지배자 신학에 길들여져 맘몬과 바벨을 노래에 파묻혀 빛을 바랜지 이미 오래되었다. 과거의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 과거의 교회사를 잃어버린 교회, 굴절된 역사를 바로 잡지 못하는 교회지도자에게는 희망이 없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희망이 없다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가난하고 천박한 기독여성들은 지식인들이 일본제국에 협력할 것을 앞장서서 성명서를 발표할 때, 눈물로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는데 앞장섰다는 사실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기독여성들의 새 시대를 향한 찬란한 역사적 사건들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새 역사와 새 시대의 희망을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 고난당하는 사람 속에서 새 역사, 새 시대를 열었다. 이 사실을 오늘 한국교회가 잃어버리고 있다는데 슬프지 않을 수 없다. 기독여성들 중에도 지도급 인사라고 말할 수 있는 인사들은 민족을 배신하고, 일본제국에 협력하며, 스스로 황국의 신민이 되었다.

역사의 중심에 기독여성 있었다

한국교회의 교인은 30년 전만 해도, 70%이상이 여성이었다. 최근에 와서야 여성과 남성의 비율이 6:4로 변화되었다. 분명한 것은 기독여성이 기독남성보다 많음에도, 교회공동체 내에서 여성은 항상 궂은일과 허드레 일을 하는 하찮은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대부분의 교단이 90년도 이전까지만 해도 여성에게 성직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9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제80회 총회에서 여성안수가 통과되면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예수교대한성결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측, 한국기독교침레회 등 일부교단에서 여성안수가 연이어 통과되었다. 여성장로, 여성목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을 비롯한 합신측, 고신측, 대신측, 그리스도의 교회 등의 정통교단들은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한 달에 한 번식 여성들에게 찾아오는 월경을 이유로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1995년 통합측서 여성안수가 통과 이전까지 신학교를 졸업한 여성들의 진로는 한마디로 교회의 심방전도사로 담임목사의 비서노릇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일부 신학교 졸업생들은 목사의 부인이 되어 목회의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사실 한국교회가 여성안수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여성안수를 허용하는 군소교단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규신학대학교를 졸업한 많은 여성들이 여성안수를 허락하고 있는 군소작은교단으로 흘러 들어갔다. 보수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중앙총회를 비롯한 합동개혁 등의 교단은 일찍부터 여성안수를 받아들여 오늘 중대형교회로 성장했다. 또한 열린총회를 비롯한 우리총회 등 여성중심의 교단도 탄생했다. 이들 교단에서의 ‘여성의 위치’는 그래도 낳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여성안수를 일찍이 받아들인 기독교대한감리회를 비롯한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마저도 ‘여성의 위치’는 미미하기 그지없다. 이들 교단에서 여성 교단장이 선출됐다는 기록은 한국기독교 130년의 역사 그 어디에도 없다.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는 총회의 총대비율만 보더라도 그것은 분명해진다. 남성지배 정통보수주의 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교회가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여성목회자들을 괴롭히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데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여성장로부총회장 3명을 내 놓았다. 이들 3명의 장로부총회장은 남성장로부총회장 후보와 당당히 맞서 선거로 선출됐다. 이들의 리더십 역시 남성 못지않게 교단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충분히 대변했다. 그리고 연합단체의 활동에 적극 참여해 중재자, 화해자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감당했다. 다만 여성안수를 허락하고 있는 감리교를 비롯한 통합측, 기장, 나사렛 교단의 총회에서 여성의 모습이 간간히 보이기는 하지만, 그 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나라 구한 역사의 주체는 기독여성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여성들의 리더십은 곳곳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과거 기독여성들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조명하기 위해 기독여성을 중심으로 한 류관순 열사 기념사업회를 비롯한 매년 6월에 드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기도회, 한국교회의 잘못을 낱낱이 밝히며, 벌이는 회개운동, 세계기독교여성지도자들을 모임인 세계목회자선교협의회, 세계기독교여성지도자협의회 등등의 단체는 오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하나님나라운동이며, 선교운동이다.

기독여성들이 한국교회의 중심으로 나오면서, 여성들의 위치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것을 시기라도 하듯 기독여성지도자들을 폄훼하고, 여성현장목회자들의 신앙을 왜곡하는 일들이 한국교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데 서글프다. 한마디로 남성들이 못하는 일을 여성들이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시샘이다.
그렇다. 21세기는 기독여성들의 <핑크빛 리더>를 요구하고 있다. 목회현장에서 여성들의 두드러진 활동은 빛도, 이름도 없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여성목회자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 대부분은 성장하고 있는 반면, 남성목회자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 대부분은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다. 또 여기에는 다툼도 끊이지를 않고 있다.

이렇게 여성목회자들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데에는 숭실대학교 구미정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핑크빛 리더>(2010년 5월 도서출판 생각의 나무)가 큰 힘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에게는 남성이 갖지 못한 위대한 힘이 있다. 그것은 어머니에게서 교육받은 생명과 평화, 사랑, 정의가 흘러넘치는 모성애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서는 다툼을 찾아 볼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핑크빛 리더>로서 새 시대를 향해 마음껏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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