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연전에 북송 재일동포의 자녀로 탈북해서 일본에 정착한 다카야스 라는 여성의 기사를 본 일이 있다. 그녀는 북한에서 자란 18년이 자신을 성장하게 한 밑거름이 됐다고 했다. 북한에서의 삶이 유복해서가 아니라, 자유를 박탈당하고,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했지만, 그 같은 역경을 견뎌낸 삶이 오늘의 자신이 되고,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계시록의 환상이 보여주는 장면도 그와 다를 바 없다. 사도 요한은 칠흑처럼 어두운 암흑기에 하나님의 영광은 반듯이 드러날 것을 믿은 사람이다. 요한의 믿음이 환상으로 표현된 것은, 그 시대가 자기 서사의 언어를 모두 빼앗겼기 때문이다. 오로지 절망과 죽음만이 지배하는 시대에 사도 요한은 환상을 통해 희망을 증언한 것인데, 환상들은 모두 어린양 예수께서 악한 권세를 심판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들이다. 그 가운데 모세의 노래(계 15:1-4/출 15:1-18)가 있다. 당연히 모세를 칭송해야 마땅한 노래이다. 그런데 그 노래 어디에도 모세의 승리와 공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있을 뿐이다. 이유가 있다. 이들에게서 ‘하늘’은 자신의 존재와 공적을 잊게 하고, 오직 하나님의 위대하심만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죄악으로 인해 형성된 자아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이름만을 드높이는 그곳이 ‘하늘’인 것이다. 이 ‘하늘’의 연장선에 하늘나라가 있다.

어떻게든 제 자랑과 공적을 드러내려는 정치인들에게 이 같은 ‘하늘’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박근혜 대통령이 벌이는 역사교과서 전쟁이 아버지 박정희를 하늘의 자리에 앉히려는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박정희와 근대화를 중심에 두지 않는 지금의 역사교과서를 ‘패배주의적인 역사’로 규정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고, 후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저변의 이유도 거기에 있음이다. 특정한 인간이 하늘의 자리에 앉는 게 무얼 의미하는가? 그의 말과 행위가 유훈이 되고 교시가 되어 미래세대의 목을 조이고, 희망을 빼앗아 고단한 삶을 살게 된다는 거다. 아무리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동경은 해도 ‘하늘’에 앉지는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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