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우리는 누가에게서 역사상 가장 큰 기적 이야기를 듣게 된다(눅 1:26-33).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천함 가운데서 태어난 소식이다. 주의 강림을 알리는 천사는 갈릴리 지방의 작은 마을 동정녀 마리아에게로 보내심을 받는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거처를 나사렛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정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마리아가 가난한 집이 아닌 부요한 집에서 태어난 여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가난을 축복하셨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가난을 축복하셨음에도 우리는 때때로 비천함과 가난함을 멸시하거나 부끄럽게 여긴다.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을 태어난 운명에 맡겨 사신 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분은 스스로 비천하고 가난하게 사셨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부에 대한 가치는 신앙보다 우선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배금주의가 만연한 가운데 그리스도는 오히려 가난을 선택하신 것이다. 만인이 흠모할 신분으로 태어나도 세상을 통치하기 어려운 터에, 가난한 사람으로 오셔서 멸시 천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분이니, 이것이야말로 지극한 사랑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 사랑의 본질을 파악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여 스스로 지혜 있는 채 하지 말라”(롬 12:16)고 하였을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가 얻은 특권(?)에 새삼스럽게 눈길이 간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말하기를 “은혜를 입은 자”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여인들 가운데 네가 복이 있도다”고 하였다. 지구상에 수많은 여인들 가운데 오직 그녀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메시아의 모친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경외로운 일인가! “처음에 한 여인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나, 이제는 한 여인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빛이 세상을 밝히게 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마리아는 여자가 짊어진 숙명의 갑옷을 벗고도 남음이 있다. 그녀는 인류를 구원한 메시아의 어머니이다. (Uversion 묵상 하태영 목사의 ‘우리 앞에 오시는 분’에서 인용)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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