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대원군은 시대 흐름에 맞춰 자주적 개국을 단행했다면 조선은 서구 열강과 평등한 조약을 맺은 최초의 동아시아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해 8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란 내용의 척화비(斥和碑)를 전국 각지에 세웠다. 대원군은 군사력으로 쇄국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망상 속에서 막대한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 호포제와 서원 철폐로 양반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은 대다 경복궁 중곤, 환곡제 부활 등으로 상민들의 지지까지 상실하면서 권력기반이 크게 약화되었다. 드디어 고종 10년(1873) 10월 쇄국론자 동부승지 최익현(崔益鉉)의 대원군 비판 상소로 대원군은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을 증명하듯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고종 3년(1866)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와 문수산성에 쳐들어 왔던 병인양요였다.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결사대가 프랑스군을 가까스로 물리쳤지만 이는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고종 8년(1871)에는 미국이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군이 강화도를 공격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미군이 퇴각하기는 했지만 강화도 광성보(廣城堡)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이었던 데 비해 조선군 전사자는 350여 명이었을 정도로 큰 피해를 보았다. 형식은 조선의 승리였지만 내용은 조선의 패배였다.(출처 : 이덕일 지음. 칼날위의 역사)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약 30년 후에 ‘태프트-가쓰라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 TKSA)이 있었고, 그 후 5년이 체 지나기 전 1910년 8월 22일에 조인, 8월 29일에 조약 발효가 이루어짐으로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경술국치(庚戌國恥) 라 한다. 이는 러일 전쟁 직후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제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문제를 놓고 1905년 7월 29일 당시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회담한 밀약이다. 이 내용은 미·일 양국이 모두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기록에는 서명된 조약이나 협정 같은 것은 없었고, 일본-미국 관계를 다룬 대화에 대한 각서만 있었다고 한다. 각서에 따르면 일제는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며, 미국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한반도를 '보호령'으로 삼아 통치하는 것을 용인 하고 있다.

일부 미국 역사가들은 두 사람이 나눴던 대화에서 새로운 정책이 만들어지거나 조약이 체결된 것은 아니므로 이는 미국이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에 협력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태프트가 자신의 의견이 미국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고, 자신만의 의견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731부대의 생체실험에 대한 악마적 행위에 대한 미국의 처리결과 등을 생각할 때 그냥 지나칠 수많은 없지 않은가? 작금에 한반도는 물론 대한민국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대국들의 움직임에서 우리는 지난 대원군의 통치행위 등을 돌아보면서, 과연 “흥선 대원군의 아들 고종 황제 통치 시에 이르기 까지 대한제국은 권욕(權慾)에만 집착하는 이들로 인하여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따라서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위한다는 위정자들,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를 위한다는 우리는 진정한 개혁의 방향이 무엇이며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과 통일과 평화는 어떻게 이룰것인가 등, 한반도에서 다시는 불행한 역사가 재발하지 않고 무궁한 발전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권욕(權慾)의 거짓 등, 모든 집착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한국장로교신학 학장/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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