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학의 전통과 계시인 진리에 대한 도전

▲ 김재성 목사
 지금 한국교회는 신사도운동이 일으킨 회오리에 휘말려 있다. 그 속내를 시원하게 밝히고 정리한 김재성 박사(사진)의 <신사도 운동의 근본 구조와 교리적 이단성>이라는 논문을 몇 차례에 걸쳐 게재함으로 신사도 운동의 실체를 고발한다.<편집자 주>

지금 한국기독교 교회는 이단과 사이비 단체 주도자들이 앞장서서 잘못된 교훈들을 퍼트려서 흙탕물이 번져나가고 있는 것처럼 되고 말았다. 국내에서 확대 재생산되는 불건전한 기독교 단체들도 많지만, 해외에서 들어온 신사도 운동은 갈수록 확산일로에 있다. 전 세계 기독교 신학과 정통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은 새로운 도전과 혼란에 직면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압축되는 극도의 해체주의와 개인주의, 기독교 신학의 전통과 계시인 진리에 대한 도전들, 기존의 교회질서를 유지해 오던 모든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과 경멸이 극에 달해있다. 물질과 과학만능주의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의미를 추구하던 정신들은 이제 “하나님이 나에게만 보여주시고 말씀 하신다.”는 신사도 운동으로 연계되면서, 극도의 개인적인 신비주의와 종교적 쾌락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기독교의 정통신앙을 헐어버리는 풍조가 만연해 지고 있는데, 새로운 영적 권세를 찾던 자들은 자기 존중, 자기 확신, 자기 확장, 자기가 받고, 자기가 발견한 계시와 그 힘에 빠져들었다. 정통 개신교 신앙에서 강조하던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를 버리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현대 종교인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동시에 개신교회 내부적으로 왜곡된 신앙을 가지고 파괴하는 자들이 새로 등장하였는데, 신사도 운동이다.

교회의 사도 성을 무시하는 신사도 운동
 
예수님께서 열두 명을 직접 선별하여서 “사도”라는 이름을 주셨다 (눅 6:13). 고귀한 권위와 능력을 갖고 있었던 “사도”는 역사상에서 단 한차례, 직접 임명되고 훈련받았던 특수한 직무를 감당했었다. 이 직무가 얼마나 중요했던지, 홀로 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밤새 지새우시고 그 이후에 그 일을 행하셨다. “사도”라는 이름은 사신, 사자, 대사,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바나바와 다른 사람들도 사도라고 불렸지만 (행14:4, 14), 계속되는 성경의 증거들을 보면 오직 열 두 사람과 이방인을 위해서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에게로 제한되었다(행2:37, 갈1:17, 고전9:5, 15:7, 계2:2, 18:20, 21:14). 초기예루살렘에서는 사도이외에는 다른 직분 자들이 없었다가, 점차 확산되면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 그리고 세계에 교회가 세워지면서 순회하면서 기독교교회전체의 통일성을 유지하도록 가르쳤다(행8:13-25, 9:31-32). 

교회는 사도 적 기초 위에 세워졌다. 그러므로 사도 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교회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교회는 사도들의 사역과 관련해서 세워졌고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어야만 교회의 참된 특징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마16:18, 엡2:20, 계21:14). 사도들은 독특성(sui generis)을 지닌 지위에 있었는데, 그들만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들의 목격자요 증거자들이었다(행4:33, 10:39-42)는 사실들을 기억해야 한다.(행6:2 고전15:5) 예수님의 모든 구원사역이 오직 단 한 차례에 그쳤기에 (once for all), 그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만 ‘사도’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이다.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그 사역은 단 한번이며, 전체를 위한 것이다. 사도가 다시 필요하지 않으며, 반복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도들이 지속적으로 후계자들을 지명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그 누구도 사도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했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사도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도, 예를 들면 디모데, 디도, 아굴라, 오네시보로, 에라스도, 드로비모 등 그 누구도 사도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공개적으로 자신을 사도

사도는 특별한 존재였으니, 특명을 받은 전권대사로서 사도들은 교회에 말씀을 주시고, 모든 인간들의 권위를 능가하는 영원한 가르침이라고 선포하였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15: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2).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 석을 알려주었는데, 그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고전 3:10-11, 엡 4:11-13). 그런데, 빈야드 운동을 하면서 만나게 된 캔사스 시티 예언가들과 폴 케인을 비롯해서 은사를 받았다는 자들과 접촉해서 활동하였던 피터 와그너가 “사도”라는 이름을 대담하게 사용하며 사도 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2000년대에 들어와서 이제 공개적으로 자신을 사도라고 칭하고, 사도들을 임명하고, 사도들의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강력한 이미지의 호칭을 대담하게 주장하는 근거를 마련했는지 알 수 없다. 자신들을 사도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이들은 정상적인 목사 혹은 선교사, 혹은 신학교수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는 것이나, 정통 개신교 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는 것도 그들에게는 무의미하다. 더구나 이들이 주장하는 “예언”이라는 것들도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왜곡하고자 성경에 나와 있는 바를 적당히 각색하고 비틀어 놓은 것들일 뿐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와그너는 자신이 보냄을 받은 사도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복음은 사도바울에 의해서 선포된 복음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2007년 미국 텍사스 주, 덴톤에서 개최된 집회에서 그는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고자 오셨다. 이 말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포기한 통치권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와그너가 선포하는 통치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 집회에 참석한 자들에게 분명히 그 의미를 밝혔으므로 더 이상 숨길 수 없으며, 비난하는 자들이 왜곡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와그너그룹 국제사도연합 조직

통치권이란 다스리는 권세를 의미한다. 한 사회에 소속한 자들을 다스리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와그너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인들에게 통치권을 주고자 왔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의 복음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를 분별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복음인가? 아니면 와그너의 복음인가? 와그너의 책,「오늘날의 사도들」에 보면, 왜 열 두 사도에게만 집중해서 배워야하느냐고 반문한다. 개신교 신학교와 성경학자들이 오늘날의 사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 어느 시대보다도 변혁의 시기에 해당하는 2001년이 바로 “제 2의 사도시대”라고 주장하였다. 첫 번째 사도시대는 불과 2백년도 채 이르지 못해서 종결되었다고 했다. 오늘날의 사도들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복종해야할 특별하고도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이요,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자들이라고 주장한다. 전혀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예언자들은 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 새로운 교리적 예언을 준다고 주장한다. 


와그너의 지휘 하에 구성된 수백 명의 회원들이 “국제사도연합”에 들어있다. 어떤 자들이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대처해야 한다. 크리스 해이워드는 “씻는 샘물 사역”의 대표인데,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 엔젤레스 북부 밴 나이스에 본부가 있다. 제인 핸슨은 국제 애글로우 대표로 워싱턴 주, 에드몬드에서 활동한다. 딕 이스트만은 콜로라도 주, 콜로라도스프링스에 있는 “Every Home for Christ”의 국제대표이다. 할 색은 국제리더십연대 대표인데, 아리조나 주, 피닉스에 있다. 리 그래디는 은사잡지의 편집인이며, 스테판 스트랭은 여러 출판사의 대표로 있다.(계속)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대학원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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