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장보연 상담학교수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나눔과 섬김을 통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이들 속에서,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나눔과 섬김을 통한 사랑실천은 소외된 인간, 단절된 인간관계, 깨어진 공동체를 치유하는 운동이다.

이것은 가난의 현실을 뛰어 넘어 창조자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환원운동이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더불어 공동체적 삶을 살면서 부자들에게 가난한 자들과 재산을 나누도록 촉구하셨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과 재산을 나눌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삭개오와 부자청년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운동은 결코 가난 자체를 미화하지도 않았으며,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격려하며,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은 수탈과 지배의 현실을 거부하고, 서로 나눔으로써 부자와 가난한 자가 참된 화해를 이루고, 가난을 극복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최근 우리사회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가난 때문에 60대 남성이 목을 매 죽었다. 세모녀가 집단 자살을 했으며, 엄마와 아기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등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섬기며, 격려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분명하게 보여 주어야 한다.

예수님이 말하는 나눔과 섬김은 무엇인가? 나눔은 가난한 사람들끼리의 나눔이다.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잘 나눈다. 부자들의 담은 높고, 빗장이 더 무겁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과 삶이 더 열려 있다.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다.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나누는 삶이 체질화되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밥은 목숨처럼 소중하다. 남은 양식이 있으면서 나누지 않는 것은 살인하는 행위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남은 것을 나누지 않기 때문에, 가난 때문에 고독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관악산 등산로에서 목을 매 자살한 60대 남성도 가난 때문에 삶을 포기했다. 그는 4개 월동안 월세를 내지 못했다. 밥솥은 텅 비어 있었고, 냄비는 말라버린 음식, 다 헤어진 이브자리와 옷 몇 벌이 이 남성의 재산이었다. 조금만 이웃이 이 남성에게 집중했더라면, 극단적인 방법은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삭막하다는 것이다. 어릴 적 완행열차를 타고 시골여행을 하다보면, 서로 나누는 인정이 흘러넘쳤다. 하지만 새마을 열차를 타면, 이런 인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3등 완행열차는 내것, 네것을 그다지 가리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서로 어우러진다. 한마디로 정이 흘러넘쳤다.

예수님의 나눔은 가난한 자들끼리의 나눔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준 정당한 몫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이 몸부림을 통하여 가난한 자와 부자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의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섬김은 타인을 위한 삶을 뜻한다. 섬김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섬김을 가로막는 것들과의 투쟁이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섬김은 그들의 삶속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들의 멍에를 깨고 그들의 사슬을 끊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나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한 예수운동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복음운동을 뛰어넘어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하나님나라운동이다. 이들의 몸부림과 절규는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창조 의도와 창조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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