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원종문 목사

한국교회의 출발점은 어디에 있는가. 신학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지난날 고난당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있던 이집트의 광야는 어디이며, 그리스도 탄생의 소식을 듣고 증언자가 되었던 목자들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서울의 한복판과 잘난 사람들이 사는 분당, 강남, 일산은 아닐 것이다. 그 곳은 노숙자들이 괴로운 삶을 이어가는 서울 지하철역이고,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중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있는 곳, 사창가에서 몸을 팔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곳, 일본군에 끌려가 시궁창보다도 못한 삶을 산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는 곳, 분단의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분단의 현장, 죽도록 농사를 짓고도 빚더미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곳이 아닌가. 이곳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

교회는 호화로운 건축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나라운동을 위한 신앙공동체이다.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 그곳에서 고난당하는 이웃들의 아우성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여기에서 이탈한 교회는 성서와 다른 것을 말하기 때문에 이단이며, 기독교를 가장한 사이비이다. 일반국민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목사와 교회를 향해 ‘사이비’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과 맺은 계약대로 맘몬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결코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 전쟁과 기아, 갈등으로 고난당하고, 인간의 탐욕에 의한 난개발로 파괴되어 가는 자연을 살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과제가 아닌가. 이것은 또 그리스도인 모두의 ‘삶의 목표’이다. 인간은 자본주의적 맘몬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한 결과, 재앙이 끈이지를 않는 세계에서 정의를 실현하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평화의 세계로 돌려놓고 신음하는 자연을 되살리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주어진 일차적 과제가 아닌가.

신의 자리를 빼앗은 교회는 종교개혁을 말 할 자격이 없다. 500백년전 루터에 의해서 발현된 종교개혁은 이벤트성 사업으로 치닫고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참담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을 신의 자리를 돌려놓고,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백날 교회성장프로그램을 진행하면 무엇하고, 국민들이 공감하지 않는 전도를 하면 무엇하겠는가. 이미 교인들의 눈에는 목사와 교회가 사이비로 비쳐지고 있는데 말이다. 한번 이단으로 규정되면, 여기에서 헤어 나오는데 수 십 년이 걸린다고 한다. 한국교회가 사이비로부터 자유롭고, 초대교회의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수 십 년이 걸리지 않겠는가.

오늘의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분단의 현장으로 들어가 하나님나라운동, 즉 평화적인 민족통일운동을 벌여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에 처해 있다. 북한은 핵을 개발해 남한을 위협하고 있으며, 미국은 북한정권의 붕괴를 위한 선제공격을 말하고 있다. 6.25전쟁을 경험한 한민족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목회자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들은 그것이 아니다. 100-300만명이 죽어도 괜찮다며, 남북한 무기경쟁을 부추긴다.

남북한 무기경쟁은 한민족 공멸을 말하는 것이다. 평화를 말하는 사람은 용공이며, 빨갱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불의한 정권을 위해서 기도하며, 국민간의 갈등을 부추긴다. 분명한 것은 미국의 자본주의 핵우산 아래 있는 대한민국은 불안한 안보에 처해 있다. 참된 평화가 아니다.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남북한 민족의 화해를 통한 참된 평화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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