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김명환 목사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 하니라”(마가복음 3장1-6절)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7일째 되는 날 안식을 가지셨다. 하나님의 안식은 생명과 기쁨이 가득한 안식이다. 갈등과 대립이 없는 평화로운 안식이다. 박재순 교수는 “이 안식을 창조의 완성이며, 인류 역사의 목적”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안식을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날에 이 안식에 들어 갈 것을 기대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일과 휴식을 설정했다. 생명을 가진 모든 피조물은 낮에 일하고, 밤에 쉬도록 되어 있다. 일 없는 휴식은 죽음이오, 휴식 없는 일은 기계의 작업이다. 일과 휴식은 삶의 본질에 속한다. 노동은 삶을 지탱해 주고, 삶을 풍부하게 해 준다. 하지만 삶의 의미가 노동에만 있는 것처럼 노동을 절대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생의 의미는 노동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더불어 안식을 취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안식에서, 인간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이웃과 사랑을 나눈다. 여기에는 이해타산이 있을 수 없다. 일과 노동이 하나님과 잇닿아 있을 때 자유롭고 창조적이다. 보람있는 것이 된다. 일과 노동만을 생각하면, 한마디로 지겹다. 기쁨이 없다. 허무하다. 무의미한 반복처럼 여겨진다.

인류가 타락하기 전에 노동은 생명의 표현이었다. 자유롭고 창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인류가 타락하여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을 때, 억압과 수탈의 관계가 수립되었다. 이 때 노동은 고달프고 지겨운 것이 되었다.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팔아야 했고, 종살이하고, 강제부역을 당해야 했다. 또 전장에 나가 싸우는 용병으로 자신을 내주어야 했다. 나쁜 기업가나, 나쁜 주인을 만나면 휴식 없는 노동에 시달여야 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갔던 흑인들의 종살이를 보라. 이들을 채찍질을 하며, 못살게 굴렀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숭배하던 백인들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유럽을 떠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문인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우상들을 비로 쓸어버리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고 되뇌면서, 항해했다.

이는 곧 신의 자리를 맘몬이 빼앗아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미국의 달러가 되었다.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요즘 크램린의 지도자들도 찬양한 자본주의 보편문명이 되었다

분명 이것은 신이 말한 노동의 가치를 잃어버린 결과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슬리고, 생명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휴식 없이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안식일법이 제정되었다. 안식일법은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삶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는 밭을 갈아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어머니는 길삼해서 가족들에게 옷을 입혀주었다. 이럴 때 우리의 부모들은 기쁨과 사랑이 넘쳐났다. 이런 노동의 가치를 잃어버린 현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과 휴식은 분명 하나님의 의도이며,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과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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