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교회 담임 하태영 목사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시인에게 인생은 그 자체가 슬픔 덩어리이다. 의식하는 모든 것, 감각하는 모든 것, 붙잡았던 모든 것, 그것들은 잠시 동안의 꿈과 같으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과 같다. 시인의 심중에 시종일관 흐르는 상념은, 인생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흙으로 돌아갈 존재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시인은 결코 비관론자가 아니다. 유한한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무한함을 흉내 내려는 만용을 부리지 말라는 경고이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망각하지 않을 때 복을 누린다. 

오랜 세월, 돌(石)은 인간의 영원에 대한 희구를 충족시켜 주는 상징물로 취급되어 왔다. 영원성, 부동성, 불변성을 담보하는 상징물이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돌에다 자신의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 전념하고 있다. 부질없는 일이다. 그 많은 돌탑, 돌무덤, 돌비, 돌로 지은 축조물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는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사 40:7-8).” 아무리 돌을 붙잡고 있어도 돌이 생명을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시인은 비록 짧은 인생, 슬픔으로 가득하지만 낙심하거나 비관하지 말고 굳건히 살게 해 달라는 기도를 올린다(시 90:17).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저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가벼운 슬픔은 수다스럽지만 큰 슬픔은 벙어리가 되게 한다.’는 말이 있다(세네카). 큰 슬픔이라니 그게 무슨 슬픔일까?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존재의 기반이 폭삭 꺼져버리는 슬픔,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슬픔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슬픔을 예찬하시는 게 아니다. 슬픔이 지닌 생명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은 진정으로 슬픔에 젖었을 때 이웃을 찾고, 하나님을 찾는다. 슬픔을 모르는 인생은 마른 막대기와 같다. 슬픔은 교류하는 감정이다. 슬픔은 삶에 대한 애처로움과 연민의 정을 지닌 사람에게서 우러나온다. 그리하여 교감의 농도가 진할수록 슬픔의 농도 또한 진해진다. 이스라엘을 너무나 극진히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슬픔의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으신 분이다(렘 1:6).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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