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 구약학 김창주 교수

카포레트(תרפכ)는 주로 출애굽기 성막 건설과 관련하여 18차례, 구약에 모두 27 차례 나온다. 히브리어 동사 ‘덮다, 가리다, 달래다, 용서하다’의 카파르(רפכ)에 뿌리를 둔다. 유대교 성경과 일부 번역본은 카파르의 어원을 살려 ‘덮개’(NJV , NEB), 또는 ‘뚜껑’(NASB, NIV) 등으로 옮긴다. 개역개정은 ‘속죄소,’ 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속죄판’으로 번역하지만 구역(舊譯: 1911년)은 ‘시은소’(施恩所)다. 흠정역의 ‘mercy seat’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최근의 NRSV(1989)도 흠정역을 잇는다.

카포레트는 속죄소, 시은소, 뚜껑 등 세 번역으로 압축된다. 먼저 뚜껑은 사전적 의미를 받아들인 것으로 법궤의 한 부분처럼 오인하게 한다. 법궤의 제작과정에서 이미 그 덮개까지 만들어진 상태를 전제한 것이기 때문에(10-16절) 카포레트는 하나님의 배타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독자적인 역할에 초점을 둔 것이다.

따라서 카포레트가 ‘법궤의 위’에 놓인다고 해서(21절) ‘뚜껑’으로 번역하면 그 의미와 기능이 축소되거나 법궤의 일부로 예속된다.<Houtman, 381> 출애굽기의 성막 제작과정에서 이미 법궤의 뚜껑과 카포레트를 서로 다른 물품으로 소개하고 있고(출 31:7; 35:12; 37:5) 외부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Sarna, 161> 즉 법궤의 뚜껑(evpi,qema)은 금 고리 네 개의 경첩으로 법궤에 붙어있고 양쪽의 두 그룹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카포레트가 덮개 위에 놓여있다.<III, 135, 137> 법궤에 언약의 두 돌판을 넣은 후 뚜껑을 덮고 카포레트를 그 위에(לע) 놓는다(출 40:20). 요세푸스의 증언을 비롯한 유대교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카포레트는 법궤 위에 놓인 별도의 견고한 순금의 판(slab)이다. 따라서 법궤와 카포레트는 별도의 두 가지 성물로 봐야한다.<Houtman, 381>

두 번째는 ‘속죄소’다. 카포레트가 피엘동사 ‘키페르’에서 비롯되었다면 ‘덮개, 뚜껑’을 가리키지만 나중에는 화목제(propitiatory)를 뜻하는 전문용어로 활용되었다. <70인역>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은 신약의 ‘화목제물’(롬 3:25)과 ‘속죄소’(히 9:5)로 약간 혼선을 일으킨다. 그리스어로 화목제물은 ‘힐라스모스’(ίλασμως)이고 속죄소는 ‘힐라스테리온’으로 위치를 상정한다. <70인역>이 카포레트의 공간적 의미를 인식한 것은 옳다. 따라서 속죄소는 ‘죄의 대속을 위해 속전을 지불하는 곳’으로 이해할 수 있다(출 21:30; 레 4:26; 시 32:1). 번제단에서 헌제자의 제물이 태워지고 성소의 분향단(תרטק)에서 연기로 사라진다. 이렇듯 헌제자의 죄는 지성소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해소된 상태다. 그렇다면 지성소의 카포레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대제사장은 일 년에 단 하루 지성소에 들어간다. 법궤 위의 카포레트에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일곱 번 뿌리고 하나님께 속죄한다(레 16:18). 카포레트에서 두 그룹의 양쪽 얼굴이 서로 마주하며 하나로 연결되듯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고 말씀하신다(출 25:22). 이스라엘의 죄는 이미 연기와 향으로 속죄되었기에 카포레트는 하나님의 배타적 현존(現存)에 그 신학적 의의가 있다. 그러니 카포레트는 이스라엘의 죄보다 하나님의 현존과 인도에 초점을 둬야하고 그 점을 부각시켜서 번역해야 한다. 이점에서 시은소(施恩所), 곧 ‘은혜를 베푸는 곳’이 힘을 얻는다. 루터 역시 ‘Gnadenstuhl,’ 최근 개정된 예루살렘 성경도 시은소로 번역한다. 사르나는 시은소가 해석에 가까우며 카포레트의 내재적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다는 입장이다.<Sarna, 161> 시은소가 카포레트의 어원적 의미를 부분적으로 넘은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살려낸 번역이다. 가장 거룩한 곳 지성소, 하나님의 현존 법궤, 그분을 호위하는 그룹, 그리고 ‘카포레트’는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이 실현되는 배타적인 공간이다. 하나님은 번제단에서 죄를 불사르고 카포레트에서 은혜를 주신다. 사족 하나. 휴 스토웰(Hugh Stowell)의 찬송 “이 세상 풍파 심하고”에서 마지막 단어는 ‘시은소’다. 그런데 <새찬송가>는 속죄소나 덮개도 아니고 “주의 전”으로 바꾸어서 카포레트의 본뜻과 뉘앙스가 전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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