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기획협회 대표 이민 교수

KBS 야구 해설위원이었던 하일성(1949~2016)에게 인생 멘토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하일성은 젊은 시절 별명이 개차반일 정도로 방탕하게 살았다. 그가 19세이던 1968년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군대 징집영장이 도착해 있었다. 그것도 베트남 전쟁(1955~1975) 영장이었다. 육군 중장인 아버지가 자신이 군에 가는 것을 면제해 줄줄 알았던 아들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머리를 빡빡 밀고 이를 갈면서 용산역에서 부산으로 가는 호송열차를 타게 된다. 그 열차에 아버지도 타게 된 것을 보고 내심 안도하며 기뻐했다. ‘그러면 그렇지. 장군인 아버지가 겁주다가 결국은 빼주겠지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불렀다. 아버지는 그 앞에서 노란색 봉투를 꺼내주며 말했다. “일성아! 이 봉투 안에는 200달러가 들어있다. 만일 네가 베트콩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면 이 돈을 주고 살아 돌아와라. 이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겠다.” 아들은 봉투를 건네주고 돌아선 아버지의 어깨가 들썩거리며 우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에 대한 모든 증오심을 거두었다. 그는 다시는 아버지의 눈에 눈물 나게 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하였다. 그는 집에서 기다리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무사히 군 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설교자인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 1908~1986)의 최고 설교작인 기다리는 아버지(저자 헬무트 틸리케, 역자 김순현, 복있는사람, 2023)가 최근 출간되었다. 틸리케는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의 궁극적 주제는 탕자가 아닌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라고 단언한다. 핵심은 인간의 불성실함이 아닌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유산을 가져가 방탕하게 지내고 돌아와도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먹이는 아버지가 주인공이다. 탕자가 집을 나가도록 허락한 이도 아버지이며, 기다리는 이도 아버지이고, 영접한 사람도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탕자가 과거의 실패에 안주하지 않고 돌아올 용기를 가진 것은 스스로 깨닫는 데서 시작하여 아버지가 기다려준 덕분이다. 참아주고 기다려준 사랑이 결국은 탕자의 회개를 이끌어냈다. 아버지는 탕자가 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렸으며 탕자가 돌아오기 전에 벌써 기다리고 있었기에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멀리서 뛰어간다.(He ran to his son.-NIV)

자신을 아들이 아닌 머슴으로 써달라고 간청하는 탕자의 속성은 율법적 태도로 에로스 사랑이다. 반면에,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와서 용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게 한다. 기다린 아버지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으신다. 어두운 과거의 연장선에서 미래가 있지 않다. 밝은 미래에 의해서 오늘이 있는 것이다.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는 기뻐했다. 왜 돌아왔냐는 꾸지람도, 비난도, 정죄도 없다. 아버지는 할 말이 많지만 아무 말이 없다.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얻은 아들이기에 잔치가 열렸다. 이것이 은혜의 속성으로 아가페 사랑의 본질이다.

프랑스의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자신의 저서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열 달 동안 희생하며 곧 태어날 소중한 아기를 설렘으로 기다리는 엄마의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다. 산타를 기다리는 아이 이상으로 아기를 기다리는 부부는 애타면서도 지고지순하기만 하다. 부모가 되어 자녀가 스스로 일어서도록 기다려주는 것만큼 최상의 교육은 없다. 밤이 깊을수록 낮을 기다림은 겨울의 기나긴 밤에 봄을 기다리는 마음과 같다. 자식의 전화를 기다리는 노부모의 가슴시린 사랑에서부터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고백을 기다리는 연인은 아름답다. 생활전선에서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들, 취업을 기다리는 취준생들, 그리고 북녘땅을 바라보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이산가족에게서 기다림은 차라리 숙명이다. 독수리 알이 부화하는 법은 간단하다.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도록 새 생명을 기다리며 따뜻하고 부드럽게 품어주는 것이다. 사랑은 따뜻한 기다림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답게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갔으며(11:8) 천신만고 끝에 얻은 독자 이삭도 바쳤다.(11:17) 그렇지만, 아브라함도 실수와 허물이 많은 보통 사람이었다. 그는 흉년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갔다. 게다가, 아브라함(아브람)과 사라(사래)는 아들에 대한 약속을 받고 10년간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는다. 이 모두가 기다리지 못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낳으리라!”의 약속을 지키신다. 다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했다. ‘기다리는 믿음으로 이미 단산한 사라와 동침하게 된다.(11:11) 아브라함은 다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기다림은 마침내 메시아 예수의 계보를 완성시킨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은 젊었을 때 세속적 향락과 마니교라는 이교에 빠져 방황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기도하여 결국은 회개하고 마니교를 떠나 주교로서 일평생을 살았다.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도 어머니의 기도로 죄에서의 방황을 청산하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시를 작사했다. 어머니의 기다림이 그를 영성가로 인도한 것이다.

사도행전의 첫 명령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1:3~8)였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기도하면서 기다렸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복음의 바탕 위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사모했다. 주님의 재림을 믿고 기다렸기에 오늘의 박해와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소망 가운데 굳건히 설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비유처럼 예수의 재림을 기다림으로 오늘의 고난을 견뎌낸다. 한국교회는 새벽을 깨우는 기도로 부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천국 지향적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다리는 자의 하나님이 유일한 피난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대림절은 가슴 설레는 시간이다. 이미 오신 예수를 기념하는 동시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이기에 그렇다.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곧 새로운 성탄일에 아기 예수를 만나기를 소망해본다. 아울러, 우리는 누구를 기다리며, 무엇을 기다리는지, 왜 기다리는지 자문해봐야 한다. 성탄절이 되기 전 너무 늦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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