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 구약학  김창주 교수

해가 바뀔 때 사람들은 새 목표와 각오를 다진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다음 해의 성장한 모습을 설계하고 소망한다. 지나고 보면 새로운 것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낯설고 신선한 시작이어야 한다. 전도서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노라.’ 인간의 삶은 세대를 넘어 반복되고 돌아서 계승된다. 새해를 앞두고 새로운 각오라느니 또 다른 시작으로 포장하지 말고 되돌아온 순간을 경건하게 마주하며 내면의 호흡에 집중하자.

시인은 야웨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서 있고(89절), “주의 성실하심”은 땅을 견고하게 지탱한다(90절)고 갈파한다. 곧 하나님이 태초에 정하신 자연의 이치와 순환은 절대 변하지 않고 꾸준하게 작동한다는 뜻이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3). 사람도 변하고 인심도 바뀌고 세월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실하게” 다스리시는 우주의 질서는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이것이 주의 성실하심이다. 히브리어 아멘과 같은 뿌리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며 겨울 가고 봄이 오는 자연의 법칙은 철칙이다. 이와 같이 주의 법을 즐거워하고 영원히 잊지 않는 것은 그 교훈과 규례와 법이 시인을 살게 했기 때문이다(92-93절).
그러나 ‘끝’에 관한 시인의 신념은 다소 생경하다. 다음은 96절의 사역(私譯)이다. ‘내가 보니 모든 것은 끝이 있으나 주의 계명들은 진실로 끝이 없나이다.’ 공동번역이나 새번역처럼 양보적인 의미를 살릴 수도 있다. “아무리 완전한 것이라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명은 완전합니다”<새번역>. ‘완전한 것’과 ‘주의 계명’의 대조는 분명하지만 ‘한계’는 ‘완전’보다 ‘무한’으로 바꿔야 한다. 자연계의 모든 것에는 필연적으로 끝이 있을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의 계명은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는 고백이다. 중세 카발라 신학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은 “끝이 없는 분”이다. 항상 그곳에 그러나 늘 변함없이 계신 분이다.

“하나님은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욥 11:8=9). 소발이 욥을 공격하는 말이다. 하나님 지식인 토라는 크고 넓어 일생을 다해도 부족하다. 그 유일한 즐거움은 끝없는 하나님 지식과 영적인 즐거움에 발을 담그며 떠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랍비 나흐마이데스에 따르면 토라는 수학이나 과학 등 세속 학문과 달리 계속 연구하고 수행하는 공부다. 하나의 고정된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칙을 숙고하며 찾는 과정이다.

Catacombs of San Callisto, Rome.
Catacombs of San Callisto, Rome.

하나님 말씀은 서로 연결되어 한 계명을 배우고 익히면 물결의 파문이 확장되듯 점점 세상과 우주로 번진다. 마침내 신비한 영적인 힘이 ‘내’ 영혼을 감싸 안고 광대한 진리의 말씀 안에 사는 은총과 즐거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오른쪽 그림은 카타콤에서 발견된 ‘키로’(ΧΡ) 십자가 일부다. 그들은 핍박을 피해 살면서 그리스어 알파(A)와 오메가(W)를 양쪽 날개에 새겨 그리스도가 세상의 처음과 끝이라고 고백한다. 대문자 또는 소문자를 섞여 쓴 예도 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소문자 오메가(w)를 먼저 쓰고 나중에 대문자 알파를 써놓았다. 앞뒤 순서를 착각한 것일까? 여기에서 언젠가 핍박이 멈추는 날(w)이 곧 새로이 시작될 승리의 처음(A)이며 그것은 모두 주님의 손에 있다는 강력한 믿음을 읽을 수 있다.

언제 순교 당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날마다 주어진 일상의 삶과 신앙을 얼마나 치열하게 실천했는지 잘 보여준다. 삶이나 시간의 마무리로 여기는 한 지점은 또 다른 시작일 뿐 ‘끝’은 없다는 통찰이다. 한 해를 보내고 ‘또 다른’ 해를 맞이한다. 지난 해의 여정이 끝나는 지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또 다른 시작이다. 세상은 끝이 있어도 계명은 계속되고, 영원한 주의 말씀은 여전히 하늘을 굳게 떠받치고 있다. 새 출발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 ‘끝이 없는 분’의 무한한 은총이 크게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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