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신학 연구원장 서헌철 목사

작금의 화두는 총선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단연 소통(Communication)이란 말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 교회나 교단, 연합회 등은 과연 소통이 잘 되고 있을까?

대니얼 골먼(Daniel Goleman)은 현대의 사람들은 그 성공에 있어서 4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한 데서,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돌이켜 보자. 그 첫째는 “나르시스형”은 자기중심적이며 공격적이고 냉정하며 타인은 나를 찬양하기 위해 존재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무조건 밀어붙이고 보며, 자신의 영광에 보탬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외면하며, 존경받기만을 원하며, 비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는 얘기만 취한다. 둘째는 “마키아벨리형”으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주위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 같으나 일단 자기 계획대로 이루어지면 폭군이 되며, 칭찬에 인색하고, 냉혹하지만 것으로는 부드러운 척 하며, 타인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교체 가능한 부속품쯤으로 생각한다. 셋째는 “사이코패스형”으로 이들은 타인은 사물일 뿐으로, 자신들의 행동은 항상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후회란 없고, 타인이 격게 될 감정적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며, 냉정하고 잔혹하며 두려움은 없다.(출처 : 대니얼 골먼(Daniel Goleman)지음. 장석훈 옮김. “SQ사회지능”)

이러한 유형들의 사람들을 웬디 T. 비하리(Wendy T. Behary)는 정신 내지는 심리치료를 받아야 할 대상들로 보고 있다(출처 : 자아도취적 이기주이자 대응심리학).

그러나 기독교 일각에서는 이러한 것을 ‘성공적 카리스마’로 본다는데 심각하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우상숭배를 악으로 생각하면서도, 탐욕과 이상화 된 허영 등을 신과 같이 숭배함으로 위의 세 유형의 사람들을 양산하지는 않는지? 카리스마가 넘치고 무조건 밀어붙이는 방식의 사람들을 ‘믿음 있는 사람’, 내지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해 오지는 않았는가? 그러한 배경 속에서의 교회 성장을 하는 것이 과연 영혼 사랑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들에게 과연 예수님을 따른 타자 적인 자기희생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등 다양한 의문을 갖게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 자기 각성은 없이, 오직 희망 또는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불의 악행, 부조리 등에 눈을 감아버리게 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회지능(SQ)은 상대방의 감정과 의도를 읽고 타인과 잘 어울리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나 IQ. EQ. 등 인간 지능이 개인의 능력을 의미했다면, 사회지능은 인간과 인간관계의 능력 곧 소통(Communication)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말을 쏟아내는 사람보다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또한 성경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7-10)는 말씀 등에서 긍정의 소통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떠한가? 불의나 부정과 타협해서라도, 확장 내지는 성공하고자 함이 우상숭배와 야합함임을 자각하고, 좀 더 정직하고 진솔한 소통(Communication)을 하려는 기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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