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일간지에서“독친(毒親)이 된 부모 당신은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섰다. 독친이라는 말이 우리들의 자녀, 십대들에 의해서 어떻게 채색되고 진화될는지 걱정이 앞선다. 이 질문을 들고 나선 두 기자는 우리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시대적인 아픔이 부모에게서 연유된 것으로 이해하고 그쪽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것도 고학력의 부모일수록 악영향이 많다는 부제까지 달고 있다. 그 예로서 지난 7월 초순에 고3 학생이 마포대교에서 한강에 투신했던 그 일을 떠올린다. 그 학생의 아버지는 사립 명문대를 졸업한 고학력자고, 어머니는 명문 국립 대에서 예술을 전공한 엘리트, 고학력 부모인데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분들은 다른 고학력 부모처럼‘좋은 학군’을 찾아다니진 않았단다. 그런데 중3이 되면서 생각이 바뀌어 서울 강남으로 주소를 옮겼다고 했다. 부모가 고학력자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초심을 버리고 좋은 학군을 따라서 학교를 옮긴 것이 원인이 아니었을까하는 반문을 하고 싶다. 평범한 실력의 드럼치기를 즐기는 밝고 건강한 소년으로 그냥 거기 두었더라면 그런 참담한 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큰 보통아이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성적 상위권 아이들만 별도로 하는 자율학습교실은 어떨지 궁금하다.”는 메모를 남긴 것으로 보아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중3때까지 다니던 그 학교에는 성적상위권 아이들만 따로 하는 자율학습교실이 없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 아이는 그 학교에서 보통성적표를 가지고도 드럼을 치며 여유로운 학교생활을 즐길 수 있는 아주 건강한 아들이 아니었던가? 뿐만 아니라“어떻게 사는 게 좋은 삶일까요? 하고 차원 높은 질문을 어머니께 던질 만큼 지혜로워서 일찍이 좋은 삶을 꿈꾸는 건실한 소년이 아니었던가? 고학력부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 우리 사회가 좋은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는 그것이 문제이다. 이 나라의 내일을 짊어지고 가야될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허우적대는 까닭을 부모에게만, 그것도 고학력부모에게 돌리는 것은 우리네 부모들에게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다. 어깨가 휘고, 허리가 부러지도록 그것도 한편만 아니라 부부가 경쟁적으로 벌고 모아도 감당이 안 되는 사교육비를 투자해야하는 현실이 어찌 부모 탓인가? 그 부모가 오늘의 위치에서 삶을 누리게 된 과정은 물론 온 몸으로 부닥치며 살아가는 현실을 누구보다 그 부모는 잘 알고 있다.

고학력자라는 타이틀은 그냥 얻었겠는가? 그렇게 독하게 살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위치가 그 부모에게 주어졌겠는가? 더는 아니라도 이 정도는 살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부모의 의무요, 도리라는 생각을 어느 부모인들 갖지 않겠는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냥 놓아두면 될게 아니냐고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결혼을 해 본 일이 없는 모태 싱글이거나 아이를 낳아본 일이 없는 그런 부부일 가능성이 크다. 사교육은 전혀 모른다. 공교육만으로 충분했다는 식의 대답은 수능고사성적 우수학생을 위하여 작가가 만들어서 손에 들려준 인터뷰용 원고일거라고 짐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 일등만 사는 세상, 성적상위권 아이들만 특별대우를 받는 그런 교실은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어려서 부터“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부모 곧 아니시면 내 몸이 없으렷다. 이 덕(德)을 갚으려 하니 하늘 끝이 없습니다.”이런 시조를 외우며 건강하게 자라도록 해야 한다. 인성은 무시되고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는 그런 사회 구조에서는 어버이가 독친이 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어도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기대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성적상위권 자녀로 만들까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아들, 딸을 행복하게 해 줄까를 생각해야 한다. 공부를 잘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면 공부도 잘하게 되고, 혹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 해도 행복한데 무엇이 문제겠는가?
 
우리나라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겨우 74로서 OECD 회원국 평균 100에 비하면 턱 없이 낮고, 순위 역시 최하위라는 통계를 모른 체 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이 행복할까 거기에 초점을 맞춰나가는 가정과 학교로 바꿔가야 한다. 언제까지 우리 자녀들의 밥그릇을 가지고 시비할 것인가? 누리 예산을 삭감할 것이냐? 증액할 것이냐? 시비하는 그 시간에 우리 소중한 자녀들이 한 없이 움치러들고 있다는 그 사실을 왜 모르는가?

예장개혁 증경총회장·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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