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1명이 먼저 가면 다 차지할 수 있을 텐데 왜 함께 뛰어 갔지? 그러자 아이들은 ‘우분투(UBUNTU)’라고 외쳤다. 다른 사람은 모두 슬픈데 어떻게 한 명만 행복해질 수 있나요?”

‘우분투’는 아프리카 코사족과 줄루족 등 수백 개의 부족들이 만날 때마다 ‘우분투’하고 서로 나누는 인사이다. 이 단어는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고난을 당하면서, 아프리카의 사람들에게 자주 강조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분투’는 아프리카 코사(Xhosa)어로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I am because you are)”, “함께 있어, 내가 있다(I am because we are)”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대 경쟁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이며, 딴나라의 이야기 같이 들린다.

이 이야기는 얼마 전 모방송에 방영돼 경쟁의식으로 찌든 현대인들에게 아직도 저런 곳이 있나(?) 하는 의문을 갖게 했다. 혼자만이 살겠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는 저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뭉클하다. 아이들에게 경쟁의식만을 심어주고 있는 오늘, 우리 사회의 어린이들과 부모들에게 교훈이 되기에 충분하다. 방송에 소개된 ‘우분투’의 줄거리는 이렇다.

초등학교 운동회날 100m 달리기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1등을 가리는 경기였다. 하지만 6학년 친구들의 선택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달랐다. 몸이 불편한 친구의 손을 잡고 다섯이서 나란히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이 아닌가.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경쟁사회에서 숨가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르쳐준 ‘행복의 품격’이었다

백색의 가면을 쓴 사람들에게 무참히 짓밟혀 온 아프리카 흑인 아이들의 이야기이지만, 그냥 남의 나라 아이들의 이야기로 넘겨버리기에는 아쉽다. 먹을 것이 없어 뱃살을 움켜쥐고, 하늘을 향해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쳐도 시원찮을 아프리카 아이들이 ‘우분투’를 외치며, 장애인인 친구를 부축하고 동시에 결승점을 통과하는 그 모습은, 백인이나, 황색인종이나, 흑인 모두사람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아프리카 부족을 연구하던 한 인류학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방법은 똑같았다. “달리기에서 1등을 하면 맛있는 과일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아이들 역시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손을 잡고 달렸다. 맛있는 과일은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욕심 없는 천진한 이 아이들의 모습에 누가 감동을 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데 있다. 경쟁의식만을 키워 온 우리의 아이들은 친구를 잃어 버린지 이미 오래되었으며, 같은 교실에서 같은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친구 모두가 경쟁의 대상이며, 적이다. 이같은 잘못된 교육은 교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내교인, 내자식을 합격시키기 위해서 100일 작정기도를 드리는가 하면, 전교인 전교인이 입시철만 되면 합심하여 기도를 드린다. 이것은 불교신도도 마찬가지이다. 내자식을 붙이고, 남의 자식을 떨어트리기 위하여 불당에서 3천배를 하며, 밤을 지새우는 광경은 “함께 있어, 내가 있다”,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우분투’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마음이 별로 편치가 않다.

오늘 대한민국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경쟁 사회로 내몰기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이 학원, 저 학원을 전전긍긍하게 만들고 있다. 한마디로 상대방을 사지로 몰아넣어야 내 아이의 입에 들어가는 것이 많고,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런 사이 우리의 아이들은 친구와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인간의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오늘 우리들의 아이에게서 ‘인간미’를 찾아 볼 수가 없다.

과거 대한민국의 아이들도 이웃 친구를 도와줄 줄 알았고, 친구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줄 알았다. 마을주민들 간에도 서로 밥을 나누는 밥상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인정미가 철철 넘쳐났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바라시던 것이 아닌가.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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