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창 훈 목사
사람을 비유로 나타낼 때 주로 산이나 나무 또는 그릇으로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산도 큰 산이 있는가 하면, 작은 산이 있고, 나무도 큰 나무가 있는가 하면 작은 나무도 있고, 그릇을 보아도 큰 그릇이 있는가 하면 작은 그릇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표현할 때 저 사람 그릇 한 번 크다, 저 사람 통 한 번 크다, 저 사람 믿음 한 번 크다고 이야기한다.

오늘 본문 말씀 11절에 보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했고, 또 누가복음 1장 15절에 보면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요한을 일컬어 이 땅에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세례요한이 무엇을 하였기에 이런 위대한 평가를 받게 되었는가? 오늘 말씀을 통해 같이 생각하기를 원한다.

첫째,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높였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3장 11절에 보면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그랬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비교해보면 세례요한이 출생도 6개월 먼저 했고,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임에 비해서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고, 좋은 가문에서 공부도 많이 하고, 선지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보다 먼저 따르고 추종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기의 위치를 알뿐더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원자 되심을 알고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의 주님으로, 높이고 높이면서 자기는 그분의 신발 들고 다니기에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낮추고 또 낮추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가장 큰 자로 인정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전부터 누구보다 앞서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전하고 높여드렸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큰 자가 되려면 자기가 피조물임을 알고, 낮은 자리에 들어가고 주님을 높이고 주님의 영광을 들내고 살면 큰 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둘째, 그의 삶이 너무나 깨끗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3장 4절에 보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고 그랬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양을 치고 일하고 사는 광야로 나가서 외칠 때 낙타 가죽으로 만든 털옷에다 가죽 띠를 동여매고 음식은 들판에 있는 메뚜기와 석청(꿀)이 전부였다. 좋은 장막도 아니었고, 좋은 음식도 아니었고, 좋은 옷도 아니었다. 가장 청빈하고 깨끗한 삶 자체였다. 이 깨끗함 때문에 마태복음 3장 2절에 회개를 촉구했고 또 7절에 보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무섭게 외쳤다. 이렇게 잘못된 신앙, 형식에 치우친 신앙, 알맹이 없는 신앙, 사람에게만 보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무서운 채찍과 음성을 쏟아 부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힘은 깨끗하고 청결한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의 이 청빈한 삶을 보시고 가장 큰 자라고 했다. 세상에서 큰 자는 돈과 권력이 많은 사람이지만 주님 앞에서 큰 자가 되려면 삶이 청빈해야 한다. 세상적으로 부귀영화 다 누리고 살면 높은 자리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각자가 깨끗하고 청빈할 때 주님 앞에서 큰 자가 되는 것이다.

셋째, 주님께 받은 사명을 늦추지 않고 끝까지 잘 감당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1장 2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사명을 감당하다가 옥에 갇혔다. 그리고 헤롯왕의 죄를 지적하다가 목이 베임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자의 위치에서 그것도 3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막힘이 있거나 장애를 받는 일이 없었다.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그대로 행했다. 동생의 아내를 억지로 취하여 부인으로 삼은 헤롯에 대하여 책망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사명에 목숨 걸고, 사명을 늦추지 않고, 살았기에 주님께서 가장 큰 자로 인정해 주신 것이다. 이런 주님의 인정하심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동아교회 담임•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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