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성경은 기본적으로 가뭄, 홍수, 기근, 전염병 등 갖가지 재난을 자연의 현상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죄 때문으로 믿는다. 따라서 재난 앞에 선 인간의 태도는, 먼저 하나님께 엎드려 ‘회개’하는 일이다.

사실 인간에게 닥치는 대부분의 재난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은 자만심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오늘의 기후변화문제, 공해문제, 환경문제, 생태계문제 등은 인간 중심의 문명이 만들어낸 결과임에 틀림없다.

이유는 많다. 좀 더 잘 살아보겠다는 욕망이 재난을 불러들인다. 과학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이 재난을 증가시킨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맹신이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의 낙관주의 안에 자기 파멸의 독소가 들어있는 것이다. 소위 ‘근대화’ ‘현대화’ 라는 말은 예측 가능한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마련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담긴 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근대화․현대화를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다.

전통이나 자연환경 역사유산 따위는 돌아볼 것도 없이 밀어냈다. 결과는 어떤가. 과학 기술이 발달할수록 명료해질 줄로만 알았던 미래 예측은 날이 갈수록 몽롱해지고 있다. 유전공학․생명공학은 기적의 선물 못지않게 공포의 이빨을 감추고 있다. 이전에는 100년 후, 50년 후, 10년 후를 내다보며 살았는데, 지금은 1년 후, 아니, 하루 뒤도 예측하지 못하여 전전긍긍이다. 사람들의 심성은 더욱 거칠어지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사람들은 내일이 없이 눈앞의 ‘오늘’에만 매달려 산다. 갖가지 종교적인 맹신주의가 사람들의 의식 가운데 파고든다. ‘진리’의 소리보다 ‘집단’ 열광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무조건 많이 모이고, 큰 집단이 되면 그게 힘이다. 교회들도 예외가 아니다. 여전히 ‘성장’ 패러다임은 교회 지도자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집단은 열광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인간의 초조함과 불안한 심리의 반영에 다름 아니다. 내일을 예측하지 못하는 삶은 늘 불안하다. 예언자 요엘이 장차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욜 2:28)고 한 말을 새겨본다. 이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것이요, 이해되고 소통되는 미래 세계를 공유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누리는 복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지금 우리의 믿음이 그러한지?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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