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날선 비방과 무력시위로 뜨거웠던 휴전선이 남북당국자들의 만남으로 일단 평온을 되찾은 것은 천만 다행입니다. 설마 하다가 큰 불로 번지는 게 전쟁입니다. 북한을 응징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입영하겠다는 애국심에 불타는 청춘들의 군복인증이 무용담으로 온라인을 달구기는 했지만, 전쟁의 참상을 막기 위해 적개심을 누그러뜨리려는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나무랄 게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파죽지세로 가나안에 산재한 성들을 함락시킬 때이다. 소문을 들은 그 땅 원주민들은 공포에 떨게 된다. 궁지에 몰린 기브온 백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저들은 이스라엘과 싸워서는 승산이 없음을 알고, 속임수로 화친 맺을 계책을 세운다. 백성의 대표로 하여금 사신단을 꾸리고 마치 먼 곳에서 온 것처럼 남루한 옷차림과 헤어진 전대, 말라비틀어져 곰팡이 난 떡을 지니고 적진 안 여호수아를 찾아간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소문으로 들었다며, 가져온 떡을 내밀며 화친을 청한다. 여호수아는 의심하지 않고 그들과 화친을 맺는다. 그리고 사흘 만에 저들은 이스라엘이 치고자 했던 기브온성 백성이라는 사실이 탄로 난다. 하지만 이미 화친을 맺은 터라 기브온성을 치지 못하게 되자, 호전적인 병사들은 화가 치밀었다. 허술한 정보로 전쟁의 진로를 결정한 것도 문제이지만, 정복자로서 만끽할 쾌감과 노획물을 회득할 기회를 놓쳤으니 경솔하게 화친을 받아들인 이들은 영락없이 반역자로 몰리게 됐다(수 9:3-21).

여호수아로서는 난감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일을 되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그들을 죽이는 대신 가장 낮은 신분으로 만들어서 백성들의 나무패는 일과 물 긷는 일을 하게 한다. 마땅히 죽일 수 있는 적진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그리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거짓말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여한 자신들의 맹세에 대한 책임이 더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갈등에 직면했을 때, 상대가 내게 어떻게 했느냐보다, 내가 그에게 어떻게 했느냐 혹은 어떻게 하기로 했느냐에 더 큰 책임을 지는 것이 가능할까? ‘하나님의 정의’는 여호수아의 고사가 보여주듯이 먼저 자신에게 책임을 귀속시키는 데서 출발한다. 불의는 반대로 행동한다. 불의는 상대의 과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없는 과실까지 만들어 뒤집어씌운다. 오늘의 남과 북은 어떤가? ‘7․4공동성명’ ‘6․15공동성명’을 비롯해 ‘2007남북정상선언’ 등 평화 공존이 가능한 약속들이 있다. 그럼에도 날이 갈수록 갈등이 증폭되는 데는 상호 약속 위반을 자신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상대에게만 귀속시키는 데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남과 북은 상호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만이 비로소 평화는 정착될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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