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20세기 미술혁명을 일으켰다는 피카소의 그림은 당시로서는 치졸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그는 마치 어린 아이가 그림을 그리듯이 조잡하게 그렸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어린애같이 그리는데 반세기가 걸렸다”고 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림이란 눈에 보이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려야 잘 그리는 그림이었다. 피카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사물의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를 그렸다. 당대 최고의 미녀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 그의 화판에는 세상에서는 가장 추한 얼굴로 그려졌다. 내면의 세계를 그렸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터득한 진리 역시 그러하다. 그는 본시 기득권자로서 예루살렘 중심의 사고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 앞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사람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순수성과 열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전의 바울에게서 메시아는 영광과 권위의 최고 정점이었다. 십자가에 달리는 메시아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던 바울에게 고난받는 메시아는 혁명 그 자체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뒤집어진 것이다.

신앙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내면을 본다. 신앙 안에서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다. 그리하여 바울은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육체”로 부르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말한다(고전 1:26-31). 육체가 무엇이겠는가? 신분, 사회적 지위, 용모, 영리함, 자기중심적 사고 등 가시적인 것들이다. 역설적인 진리이다. 만일 이 진리가 단지 관념적인 것이었다면, 정신 수양의 교훈은 될 수 있을지언정,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 이들을 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심각한 불신의 대상이 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생명의 복음을 성공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복음의 불가시성보다 가시성에 더 매달렸다는 말이 다. 복음을 위해 일한다는 사람들의 자기 자랑과 탐욕은 세속의 범부를 뺨칠 정도이다. 자기 육체를 자랑하는 수단으로 복음을 선전하고 있으니 어떻게 역설적인 복음의 기운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겠는가. 복음의 적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 탐욕과 자기 자랑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으면 복음은 빛을 잃게 된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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