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 호 관 목사
어느 날 한 소녀가 명장 나폴레옹의 막사에 들어가 장군의 발치에 자기 몸을 던지면서“폐하,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 아버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 소녀는“제 이름은 라욜라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눈물로 호소하기를 “폐하, 제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라고 절규하였습니다. 그 말에 나폴레옹은 “오, 귀여운 소녀여! 나는 너를 위해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구나. 네 아버지가 국가 반역죄를 범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소녀는 “저는 지금 폐하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탄원하고 있습니다. 오, 폐하! 제 아버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거듭 말하였습니다. 눈을 감고 침묵하던 나폴레옹은 그 어린 소녀의 손을 잡고서 “그래, 얘야! 내가 너를 위해서 네 아버지를 용서해 주마. 이제 됐으니 돌아가거라.”고 말했습니다.

어린 딸 라욜라는 나폴레옹에게 정의를 구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탄원하였던 것이다. 그 아버지를 살린 것은 칼 같은 정의가 아니라 어머니의 품 같은 용서였다. 우리는 공의와 용서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한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우선 말할 수 있을까? 특별히 교회에서 공의만을 고집한다면 그 공동체에 은혜를 찾고, 사랑의 맛을 느낄 수 있을까?

요한복음 8장에 공의와 용서가 충돌하는 현장을 기록해 두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가여운 여인을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끌고 와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하고 묻는다. 그야말로 예수님을 진퇴양난의 중심에 세운 것이다. 예수님을 코너로 몰아세워 놓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순간 쾌재를 불렀으리라. 올무로 걸어 넘어지게 하려고 덫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 여인을 치지 말라하면 율법(=공의)을 폐기하거나 무시하는 자가 되고, 율법대로 치라하면 사랑의 주가 아니라 매도당할 수밖에 도리가 없게 되었다. 요한은‘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라.’고 현장을 명석하게 평가한다.

예수님께서 이를 모를 리 없다. 그 고발에 대하여는 침묵하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쓰고 계셨다. 참을성도 사랑도 없는 그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재촉하였고 예수님은 쓰시던 일을 잠시 멈추고 입을 여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가히 폭탄선언이었다. 과연 그들 중에, 아니 우리 중에, 죄 없는 자가 누구라서 감히 누구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성경에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던 그 내용이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감히 짐작하기는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 것은 그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의 죄를 하나, 하나 기록해 나간 것은 아닐까?
요한은“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서있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기록한다. 실로 지혜의 왕 솔로몬의 재판을 훨씬 능가하는 명 재판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단순히 예수님의 명 재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실천적으로 아주 이례적인 현장을 통해서 가르치신 그 주님은 지금도 용서함에 인색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들을 향하여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심을 환기하고 싶어서다. 베드로는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하고 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자기가 모범답안을 제시하기를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일곱 번의 용서! 대단하지 않은가?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일곱 번을 일흔 번 하면 사백아흔 번이 된다. 어찌 용서를 그 숫자로 국한하셨을까? 그렇다면 나는 이미 한도를 넘고도 남았을 것인데...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용서를 위한 기도를 빼지 않으셨고, 십자가의 그 고통 중에서도“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이다.”용서의 중보기도를 하셨음을 우리는 왜 잊고 사는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고, 보다 은혜로운 교회를 이루어가는 비결은 용서뿐이다. 이보다나은 비책은 없다.

예장개혁 증경총회장·본지논설위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기독교라인(대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